'한국' 불교 전통의 출현
로버트 버스웰 Robert E. Buswell Jr.
1. 머리말
로버트 버스웰은 이 논문에서 '한국'민족의 불교 전통이 궁극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존 던컨John Duncan의 "근대 이전 한국의 원형적 민족주의 Proto-nationalism in Premodern Korea"와 와 베네딕트 엔더슨 Benedict Anderson의 책 <<상상의 공동체 Imagined Communities>>, 케네스 웰즈 Kenneth Wells의 책<<새로운 신,새로운 민족:1896-1937년 한국의 프로테스탄트와 자기-재구성 민족주의New God, New Nation: Protestant and 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 in Korea,1896-1937>>를 참조하고 있다.
에릭 홉스봄 E.J.Hobsbawm의 책 <<1780년 이후의 민족들과 민족주의:프로그램,신화,실제>>도 인용은 되고 있으나 간접적인 것으로 보인다. 홈스봄은 '집단 소속감'이 근대민족국가형성을 위한 전근대적 토대를 마련했을 것이라고 제안하는 원형적 민족주의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했다고 한다. 버스웰은 '고려 왕조가 망하면서 한반도에서 불교의 황금시대, 곧 불교가 한국의 원형적 민족주의를 위한 종교적 기반이 될 수 있었던 기회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말하고 있다.
버스웰의 UCLA 동료인 존 던컨의 책에서 인용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엘리트들과 나아가 민중들이 그들 자신을 지속적인 정치적 공동체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은 고려시대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버스웰은 "한국 '민족'이라는 개념이 19세기말 동아시아의 제국주의자들의 압력 아래 부상하였고 마침내는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과정에서 만들어진 근대의 구성물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버스웰은 "근대 이전 한국의 불교도들은 아마도 그들 자신을 '한국'불교도라고 여기기보다는 법맥에 따른 문중의 일원, 하나의 학파 또는 하나의 수행전통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지칭한다면, 그것은 '한국 불교도'이기보다는 '제자' '스승' '포교승' '교학승' '선 수행자'등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발언의 배경에는 위 인용된 앤더슨의 책이 있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귀족 계급 발명에 관한 앤더슨의 견해 그러니까 그 당시 프랑스 귀족 계급의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을 그러한 계급의 일부로 여기지 않고 'X의 주군','남작 Y의 삼촌',공작 Z에 속한 사람'과 같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관련된 사람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한국 불교도들에게 한국민족의 불교라는 의식이 없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혁명이전 프랑스 귀족이 계급의식이 없었다는 점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버스웰은 묻는다.
"그렇다면 불교도 사이에서 진정 최초로 한국인으로서의 '민족' 감정이 일어났음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지점에서인가?"라고. 그의 대답은 '조선 후기와 일제 식민치하의 처음 20년간'이라는 것이다. 그 때 일어난 '한국 불교 내부에 싹트기 시작한 불교 개혁 운동'에 대해 버스웰은 위에 언급한 케네스 웰즈의 책에서 명명하고 있는 '자기-재구성 민족주의' 또는 '윤리적 민족주의 ethical nationalism'를 언급한다. '개인들의 공동체가 민족을 형성할 준비가 될 때 까지' 작동하는 민족주의가 그것인 것으로 보인다.
버스웰이 종교적 보편주의 ecumenism를 얘기하면서 위와 같이 판단하게 되는 자료로는 두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 한국이 현재불인 석가모니가 태어난 장소보다 오래된 초기의 불국토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인도의 아쇼카 왕이 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해 그의 제국 전역에 세운 8만 4천개의 부도탑 중 일부가 한국에서 발견되었다고 주장한다거나 대승불교의 수호신인 용왕과 한국사이의 직접적 연관을 내세우는 것.
둘, 6세기 초까지 소급되는 다양한 ‘고승전’ 류에서 ‘일본승’ ‘한국승’등의 별도의 항목이 없다는 것.
2. 근대 이전의 불교 승려들
서산 휴정(西山 休靜,1520-1604):문화적 자기반성cultural introspection)을 보여주며 지눌 知訥 1158-1210의 저작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자기 성찰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명나라 황제들의 외국인 혐오증에 의해 촉발되었을 것이다. 명의 황제들은 불교도가 되었든 유학자가 되었든 한국인이 중국에 와서 공부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이들이 (고국에 머물러)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게 하였던 것이다.
3. 근대 이후의 불교 승려들
일제 점령기의 개혁운동들
일제 식민지 시기의 한국의 불교 개혁 운동들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첫째는 보다 보수적인 운동으로서 전통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온 한국의 불교 사상과 실천의 형태를 복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보다 진보적인 운동으로서 불교를 근대적 삶의 필요에 부응하도록 만들 여려 혁신들을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승려 결혼 허락에 관해서는 일본 불교를 접하게 됨으로써 촉진되었으나 민족주의적 자존감으로 그 '개혁'은 좌초되었다.
보수적 개혁 운동들
송경허(宋鏡虛,1849-1912)는 간화선의 수행법을 한국불교 수행의 최고의 위상으로 복원시킴으로써 고려 말의 임제선 수행을 재창조하고자 하였다.
백학명(白鶴鳴,1867-1929)은 선농禪農불교 이념을 제창하였다.
백용성(白龍城,1864-1940)은 보수적 개혁가들 중 아마도 가장 중요하며 가장 전통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는 선불교(간화선-공안 화두 참구)를 적극 지지하였다. 그는 혜월(慧月,1861-1937) 및 만공 (滿空 1872-1946)과 함께 수행하였는데 이들 두 사람은 19세기 한국불교에 있어서 인습을 타파하는데 앞장섰던 인물들이다.
용성 스님은 1919년 삼일독립운동에 한용운과 함께 참여한 바 있고 감옥에 있던 1년 반 동안 많은 불교 서적들(특히 화엄경)을 한문에서 한글로 번역하였다. 용성스님은 승려들의 독신 생활을 적극 옹호하였다. 그는 선수행과 농사의 결합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아 백운산 암자 그 곳에 1만여 그루가 넘는 감과 밤을 심고 가꾸었다. 포교에 있어서 기독교와 경쟁하기 위해 불교라는 이름을 '대각교大覺敎'로 바꿀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의 글 "귀원정종歸源正宗"은 불교를 유교 도교 기독교와 비교한 소논문이다.
박한영(朴 漢永 1870-1948)은 보수 진보 사이의 다리를 놓은 이로서 선정 수행과 교리 공부라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출 것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접근법은 고려시대 이후 한국불교를 특징짓는 것이다. 그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식을 확충하고 서구의 진보적인 가치를 불교에 도입하여 불교를 근대화해야 한다고 보고 청년 불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한용운과 진보적 개혁가들
만해 한용운(1879-1944)은 1905년 27세의 나이로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가하였다. 중국 량치차오 (梁啓超 1873-1929)의 저작을 읽고 지대한 영향을 받아 시베리아 유럽을 거쳐 미국에 여행하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것이 실패하자 1905-6년 사이에 블라디보스톡에 갔다. 1908년 서른 살의 나이로 일본에 갔는데 불교의 전통적인 형태와 근대 기술 문명이 조화되어 있는 일본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그는 근대적 과학적 노선을 따라 불교가 진보할 것을 요구하였다. 1910년 소논문인 "조선 불교 유신론"을 썼다. 한국인이 서구의 진보주의를 불교적 맥락에서 적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 최초의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개량주의적 merioristic 입장(세계가 끊임없이 진보하여 마침내 이상적인 문명에 도달할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는 불교가 조선 왕조 동안 산 속으로 쫒겨들어갔기 때문에 승려들은 세계의 변화된 조건들에 무지했으며 새로운 환경에 지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고 이에 세상을 향해 모험을 시도하기를 꺼려 무의식적으로 소심해져버렸으며 이러한 소심함은 불교가 지속적인 진화를 할 수 있는 정신적인 경쟁력을 약화시켜 불교를 퇴보시켰다고 보고 있다.
그는 불교의 모든 다양한 가르침들이 크게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라는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진다고 설명한다. 전자는 세계평화, 자유, 보편주의, 민족자결권으로 이어질 수 있고 후자는 자기 본위적이며 자기잇속만 챙기는 행동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대자비심으로 모든 존재들이 상호 의존하고 협력하고 있는 실상에 대한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불교는 산중에서 벗어나 촌락과 도시의 보통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라 불교사원들이 산 속을 떠나 도시로 옮겨가야 한다는 주장이나 불교의례와 경전들을 대중화하여 불교이해의 촉진을 도와야 한다거나 불교의례와 사원의 재산을 합리적으로 운영해야한다는 주장이나 사찰 소유의 농업협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승려들도 세속학문을 배우고 해외유학도 하고 불교교과목학습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승려들에게 대처(또는 처대)를 허용해야한다는 주장도 승려와 일반 신도 사이의 눈에 띄는 균열을 해소하고자 제시된 것이다. 그는 1910년에 나온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결혼금지를 주장하는 네 가지 주요 논변들(害於倫理,害於國家,害於布敎,害於風化)을 제시하고 하나하나 반박한다.
인쇄자본과 불교도의 자각
불교신문과 잡지들이 일제 강점기 초기부터 간행되었다.(조선불교월보,해동불교,불교진흥월보,불교 등) 근대적 형태의 종교를 탐색하기 위해 잡지에 자국어인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한국적’ 불교 전통에 대한 독립감을 만들어 내는 중대한 단계였으나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정의하려는 명시적인 시도는 찾을 수 없다. 만해 한용운 역시 ‘조선 불교’라는 용어를 저작들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동아시아 전통과 구분되는 교리, 수행체계, 세계관을 재시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조선불교통사>>를 지은 이능화도 다수 수집한 한국자료들을 분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한국불교”에 대한 최초의 정의들
한국불교를 중국적 전통으로부터 구별시키려는 노력이 최초로 명시적으로 문헌상에 나타난 것으로는 역사학자인 최남선(1880-1957)이 1930년에 써 1931년에 <<불교>>잡지에 발표한 “조선 불교: 동방 문화사 상에 있는 그 지위”라는 긴 논문(하와이에서 열리는 범아시아 불교에 관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라 함)을 들 수 있다. 그는 한반도의 불교가 중국의 교리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독립적인 창조성을 발휘하여 ‘조선불교’를 창조 수립하였다고 말한다. 인도 중앙아시아의 불교가 서막이고 중국 불교가 그 이후 몇 장이라면 조선불교는 마지막의 결론을 장식하는 장이라는 것이다. 반도불교의 영광스런 사명을 수행한 이로는 원효를 들고 있다. 반도불교의 역사적 사명이라 할 수 있는 통統ecumenical불교, 전全comprehensive불교, 총합總合syncretic불교, 통일統一unified불교가 그에 의해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4. 나오며
버스웰의 이 논문은 결국 1931년 잡지에 실린 최남선의 글에서 한국 불교 전통이 출현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 불교학자들도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고 한다. 다카쿠스 준지로 高楠順次郞가 1938년에서 39년 사이에 강의했던 내용에 기초한 <<불교철학의 본질the Essentials of Buddhist Philosophy>>이라는 책에는 인도와 중국의 모든 불교철학은 일본불교로 환원된다는 주장이 있다고 한다.(“....모든 다른 학파들로 이루어진 전체의 불교철학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에서 불교의 이력을 제시하는 것이다. 불교문헌, 곧 삼장의 전부가 보존되고 연구된 것은 일본이다”)
다카하시 도루 高橋 亨의 1928년 저서 <<이조불교 李朝佛敎>>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조선불교는) 초기의 중국불교에 완고하게 집착한다. 따라서 그 일반적인 특징은 독립성이 결여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불교는 독자성과 창조적인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
최남선의 글은 이런 일본인들의 주장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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