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원운래 환력기념 축하 논문집 사진
*인터넷 불교신문 참조자료(오기하라 운라이, 와타나베 가이쿄쿠)
오기하라 운라이(荻原雲來, 1869~1937)
범어불전 연구에 모든 것 바친 진정한 학자
“원전 이해해야 본뜻 제대로 파악”
각종 번역문헌 치밀하게 대조연구
사후 ‘한역대조 범화대사전’ 결실
고전문헌을 연구할 때는 말의 본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불교의 출발점인 인도불교를 연구할 때는 산스크리트어 불교문헌을 정확하게 해독해야 한다. 그 작업을 통해 잘못 한역(漢譯)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역문헌에 비해 산스크리트어 원전은 극히 일부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은 상식적인 방법론으로 통하지만 이것이 확립된 것은 19세기말 유럽에서다. 그 시기 일본유학자들은 한역불전 지식으로 유럽 연구가들에게 많은 조언을 주었다. 난죠 분유우(南條文雄)부터 시작하여 다카쿠스 준지로우(高楠順次), 그리고 오기하라(일명 오기와라) 운라이로 이어간다.
운라이는 1869년 와카야마(和歌山)현에서 도바시 토메키치(土橋留吉)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둘이 상경해 정토종(淨土宗)의 오기하라 운다이(荻原雲台)의 제자가 됐다. 운다이 아래서 득도(得度)하여 ‘운라이’로 이름을 바꿔, 스승의 호적에 ‘오기하라 운라이’로 오르게 됐다.
1886년(18세), 정토종학지교(淨土宗學支校)에 들어가 정토종학본교(淨土宗學本校)까지 진학했다. 이 때 모치즈키 신코우(望月信亨), 와타나베 가이쿄쿠(渡邊海旭)와 동창으로서 이 세 명은 항상 좋은 라이벌이었다. 운라이는 입학하기 전에 영어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탁월한 어학력으로 주위를 압도했다. 또 학교에서는 통상의 과목 외에 〈구사론(舍論)〉과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을 연구하고 있었다. 1896년(28세) 정토종학본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동교(同校)의 교수가 되서 〈구사론〉을 강의했다. 아울러 정토종의 우수인재 해외유학 계획에 따라 운라이는 1899년(31세) 와타나베 가이쿄쿠(渡邊海旭)와 함께 제1회 해외유학생으로서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스트라스브르그(당시는 독일령)의 ‘카이저=빌헬름 2세대학’의 로이만(Leumann) 교수에 사사하여 산스크리트어를 전공했다. 범문(梵文) 〈유가사지론보살지(瑜伽師地論菩薩地)〉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05년(37세) 귀국과 동시에 도쿄의 종교대학(현재의 다이쇼대학)의 교수가 되어 범어(梵語)를 중심으로 강의하게 됐다. 그 후 부잔대학(豊山大學),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서 범어를, 릿쇼대학(立正大學)에서는 범문〈법화경〉을 강의했다. 귀국2년 후인 1907년(39세)에는 시바중학교(芝中學校) 교장 겸 학감(學監), 1908년(40세)에는 종교대학의 교두(敎頭), 1915년(47세)에는 숙덕여학교(淑德女學校) 교장을 맡았다. 1922년(54세)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25년(58세)에는 정토종으로부터 권학(勸學) 승계(僧階)를 받았다.
1926년(59세) 종교대학은 다이쇼대학으로 바뀌어 불교원전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범문학(梵文學) 학과는 ‘성전학(聖典學)’ 학과가 됐다. 만년에는 〈범문화역 칭우구사론소(梵文和譯 稱友舍論疏)〉과 〈범문유가사지론보살지(梵文瑜伽師地論菩薩地)〉를 출판했다. 그리고 만년의 사업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역문헌을 대조한 범어사전의 출판계획이다. 1928년에 운라이를 중심으로 편찬간행회가 발족하여, 다음 해부터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그 도상인 1937년(69세) 운라이는 병으로 타계했다. 그 후 그 사업은 후진들에 의해 계속되어 50년 후인 1978년에 완성됐다.
운라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그야말로 학자이다. 학문 이외에는 어디에도 흥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의 성품은 젊은 시절 함께 독일에 유학한 와타나베 가이쿄쿠와 대조적이다. 가이쿄쿠는 사교적이며 남을 돌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귀국 후에는 사회사업으로 분주했다. 그에 비해 운라이는 조용한 학자로서 항상 홀로 공부에만 전념, 범어불전연구에 생애를 바쳤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호(號)도 ‘독유(獨有)’였다.
카이쿄쿠의 회상에 따르면, 카이쿄쿠가 밖에서 술을 마시고 숙소에 밤늦게 돌아와 보면, 운라이의 방에는 언제나 불이 켜져 있었고,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에만 힘쓰는 운라이를 스승인 로이만도 매우 좋게 평가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고대 인도어 연구가 진행되어, 불교문헌연구도 어느 정도는 진행되고 있었지만, 한문, 티베어 등 언어계통으로 다른 언어까지 통하는 학자는 거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운라이는 일본불교 속에서 계승되어 온 구사(舍), 유식(唯識) 등 이른바 성상학(性相學)을 기반으로 해서 유럽 학자들에게 많은 조언을 주었다.
운라이가 유럽 학계에서 인정을 받게 된 계기는 영국.캠브리지 대학의 불교학자 벤돌(Bendor)이 범문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을 불교문고(Bibliotheca Buddhica)로 간행할 때, 운라이가 한역부분을 도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운라이의 이름이 유럽 학계에 알려지게 되어 이윽고 캠브리지 대학에 보관돼 있던 범문 〈유가사지론〉 조사도 허가됐다. 그런데 이 사본은 상태가 나빠서 정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운라이는 그것이 한역 〈유가사지론보살지〉의 범본(梵本)인 것을 간파, 한역을 대조하면서 엄밀하게 연구하게 됐으며, 로이만은 그 결과를 박사논문으로 할 것을 권했다.
로이만은 “나는 오기하라 운라이가 유럽인에게 미지(未知)인 중국ㆍ일본불교 번역문헌에 능통한 것을 경이(驚異)의 찬 눈으로 봤다”고 말해 자기가 모르는 부분은 운라이에게 질문해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로이만은 유학생들에게 하숙부터 입학수속까지 도움을 주는 인정가였다. 운라이가 귀국한 후도 일본에서 온 유학생들을 돌보는 것을 잘 했지만, 유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언제나 “오기하라는 그런 짓을 안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운라이를 신뢰했다고 한다.
1930년에는 운라이 환갑기념 논문집이 간행되었다. 거기에는 일본학자 13명, 유럽학자 9명이 원고를 보냈다. 유럽학자들의 이름을 보면, 스승인 로이만을 비롯해 영국 Pali Text Society의 리스 데이비스(Rhys.Davids), 프랑스 불교계를 대표하는 뿌생(Louis de La Vallee Poussin), 오스트리아의 인도학자 빈터니츠(M.Winternitz), 러시아의 인도학 불교학자 체르바츠키(Ts.Stcherbatsky) 등 당시 세계를 대표하는 인도학 불교학자가 나란히 하고 있다. 이것으로도 운라이가 유럽 학계로부터 어느 정도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학문에 엄격한 운라이는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논쟁을 했다. 어떤 학자는 3년간의 인도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논문과 범어경전 번역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운라이는 엄격하게 비판했다. 그에 대해 이 학자는 운라이의 비판에 납득하지 않았지만, 논파할 만한 학문적인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인도에 가서 연구를 계속했지만, 풍토병에 걸려 객사(客死) 했다고 한다. 이것도 학문의 엄격함일 것이다.
“연구 할 수 없으면 죽는 것이 낫다.” 이것은 운라이에게 얼마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1923년 10만명 이상의 사망자.행방불명자를 낸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때 운라이도 거의 모든 장서를 잃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독일에 있을 때 8개월 걸쳐 필사해서 가져온 〈구사론〉과 〈현관장엄론(現觀莊嚴論)〉의 범본만은 몸에 지니고 피신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운라이가 타계하기 전에 완성을 보지 못한 〈한역대조 범화대사전(漢譯對照梵和大辭典)〉. 운라이는 독일에 있었을 때 〈Maha-vyutpatti, 번역명의대집(飜譯名義大集)〉을 얻었다. 이 문헌은 9세기경에 성립한 산스크리트어와 티베어를 대조한 일종의 사전이었다. 원래 말의 본래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을 연구의 기본으로 했던 그는 이 문헌의 연구에도 힘썼다. 그 연장선에 산스크리트어와 한역 그리고 일본어를 대조한 사전을 구상한 것이다. 간행작업은 1928년 편찬간행회가 발족돼 그 다음 해부터 작업이 시작됐다. 1937년에 운라이가 타계하자, 쓰지 나오시로우(直四) 등에 의해 작업이 계속됐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 6분책(分冊)을 간행한 단계에서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아쉽게도 사업을 중단해야 했다. 다행히 전후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가 회장을 맡은 스즈키학술재단(鈴木學術財團)의 협력으로 사업이 재개됐다. 그리고 1962년부터 속간의 간행이 시작돼 1974년까지 제16 분책이 간행됐다. 그리고 1975년에는 증보(增補) 개정(改訂)판 편찬에 착수, 1978년 마침내 완성했다. 그것은 반세기 동안 100여명이 넘는 학자들의 노고의 결정체였다.
〈인도의 불교〉 〈실습 범어학〉 〈범한대역불교사전 : 번역명의대집〉 〈석가모니성훈집 : 파토시후미 숫타니파타〉 역주〈법구경〉 〈화역칭우구사론소〉 〈범문 법화경〉 등의 저서와 사후에 출간된 〈오기하라 운라이 문집〉 등이 있다.
사토오 아츠시 일본 동양대학 동양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불교신문 2238호/ 6월21일자]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74147
와타나베 가이쿄쿠(渡邊海旭, 1872~1933)
대승정신에 입각한 불교사회사업 주력
‘근대 정토종의 수재’…1기 해외 유학생
계율 통한 사회개량 ‘신계율주의’ 주창
대정신수대장경 편찬에도 참여 큰 업적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4년)을 계기로 일본의 독점자본주의 체제가 확립됐다. 그에 따라 노사간 계급분화도 진행돼, 사회문제가 잇따라 발생했다. 이 무렵부터 사회주의 사상이나 사회개량론도 활발하게 제기되고, 불교에서도 사회활동에 관한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대승불교정신에 근거해 불교사회사업을 실시한 이가 와타나베 가이쿄쿠(호는 코게쯔, 壺月)이다. 그는 교육자로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학자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가이쿄쿠는 1872년 도쿄 아사쿠사(淺草)의 상가에서 태어났다. 10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13세에 도쿄 고이시카와(小石川)의 정토종(淨土宗) 겐카쿠지(源覺寺)의 하야마 가이조우(端山海定)의 제자가 됐다. 정토종학도쿄지교(淨土宗學東京支校)와 정토종학본교(淨土宗學本校) 졸업 후에는 정토종 학교 교사가 됐으며, 또 종파 기관지인 ‘정토교보(淨土敎報)’의 주필로 취임했다. 26세 때 도쿄 후카가와(深川)의 사이코우지(西光寺)의 주지가 되었다. 1896년에는 정토종 내지 유학생으로 명령을 받아 비교종교학을 전공했다.
1899년(27세), 사카이노 고우요우(境野黃洋)들과 함께, 불교계 각성을 촉구하기 위한 불교청도동지회(佛敎淸徒同志會)를 설립, 불교와 국가사회의 관계를 논했다. 다음 해인 1900년(28세), 정토종으로부터 오기하라 운라이와 함께 제1기생으로 해외유학을 명령받아 독일 스트라스브르그(현재는 프랑스령)의 카이저 빌헬름 2세 대학교에 갔다. 그곳에서 고대인도 제언어를 전공한 로이만(Ernst Leumann, 1859~1931) 교수에게 사사를 받으며,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팔리어를 기초로 비교종교학을 연구했다. 또 유럽에서의 사회와 종교와의 관계를 관찰했다. 1907년(35세) ‘보현행원찬(普賢行願讚)’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0년(38세)에 귀국한 그는 종교대학(현재의 다이쇼, 大正) 토요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것과 동시에, 정토교보 주필로 복귀했다. 1911년(39세)에는 정토종 노동공제회(淨土宗勞動共濟會)를 설립, 본격적으로 사회사업에 착수했으며 정토종이 운영하는 시바중학교(芝中學校) 교장으로 취임했다. 1918년(46세)에는 계율의 엄수를 사회개량의 기반으로 하는 ‘신계율주의’를 제창했다. 1923년(51세), 다카쿠스 준지로오(高楠順次郞)와 함께 〈타이쇼 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간행에 착수했다. 같은해 조우죠우지(增上寺) 교감으로 취임해 종파내에서 중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1924년(52세), 일본종교협회 이사로 취임했다. 같은 정토종으로 사회사업에 진력해, 삼계교 연구로 유명한 야부키 게이키(矢吹慶輝)와 함께 국제사회사업협회 일본위원으로 추천됐다. 1928년(56세), 정토종 최고 학위인 권학(勸學)에 올랐다. 1929년(57세), 동서불교관계대학의 교수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학협회를 창설하고, 일본금주동맹 이사가 되었다. 1933년(61세), 〈타이쇼 신수대장경〉 완성의 다음 해에 병몰. 정토종부터 대종사(大僧正)로 추증(追贈)되었다.
가이쿄쿠의 인생은 불교 정신에 투철하면서 특히 사회사업의 분야에서 깊은 관심을 쏟았다. 원래 ‘사회사업’이라는 이름의 명명자가 가이쿄쿠라고 한다. 그는 불교가 사회에서 완수해야 할 역할에 대해 관심을 갖고 불교청도동지회를 설립하거나, 유학중에는 러시아의 혁명당 인사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세계적 흐름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리고 귀국한 1910년에는, 노동자 보호시설인 정토종노동공제회 및 무료직업소개소 중생은회(衆生恩會)를 설립했다. 게다가 1912년에는 도쿄 거주의 유시와 함께 불교도사회사업연구회를 창설했다.
그러한 그의 사고 배후에는 유학 중에 견문한 근대 유럽의 사회사업사상과 그의 신념인 대승불교의 정신이 있다. 그는 “유럽에서는 종교가 빈부의 조화자(調和者)가 되고 있다”고 말해, 사회의 진보에 따라 발생하는 빈천자(貧賤者), 하층사회(下層社會)에 대한 교육이나 자선 등은 종교인이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대승불교가 여러 종교 중에서 가장 철저하고 보편적인 것은 물론, 이것은 현대문화 혹은 신시대를 만드는데도 가장 필요하고 의의 있는 것”이라며 사회개량에 있어서 대승불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정신이며, 이것을 현실사회에 적용한 ‘정불국토, 성취중생(淨佛國土 成就衆生)’의 실천이 목표라고 했다.
그는 사회적 공헌의 면에서 불교가 기독교에 뒤떨어지는 것은 계율 준수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기독교가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계율에 엄정한 지도자가 사람들의 모범이 되고, 사회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불교도 그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18년에 ‘신계율주의’를 제창, “새로운 계율주의의 요점은 풍기상에서의 현대의 지도에 있다”면서 사회문제 해결의 근저에 지도자의 계율 엄수를 두었다. 그가 모범으로 꼽은 인물은, 18세기에 정법률(正法律)을 제창한 지운(慈雲, 1718~1804)과 메이지 초기에 계학의 부흥에 의한 승폐일세(僧弊一洗)를 주창해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모은 후쿠다 교우카이(福田行誡, 1809~1898)였다.
이러한 사상은 학문연구와도 결합되고 있었다. 그의 연구는 티베트 불교나 밀교의 분야가 많지만, 독일에서 학위를 얻은 것은 ‘보현행원찬(普賢行願讚)’ 연구였다. 보현행원찬은 당나라 때에 반야삼장(般若三藏)이 번역한 40권 〈화엄경〉의 말미에 나오는 보현보살의 십대원(十大願)이며, 그 중에는 아미타불이나 서방왕생도 말해진다. 이것은 입도귀의(入道歸依) 할 때에 독송(讀誦)하는 참회문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의 전거이기도 하고 불교도에 중요한 문헌이다. 그런데 그가 보현행원찬에 주목한 이유는 정토종 스님으로서 아미타불이나 서방왕생이 말해지고 있었기 때문 만이 아니다.
그가 존경한 지운은, 에도시대에 범어(梵語)를 연구해, 〈범학진량(梵學津梁)〉이라는 큰 저작을 저술했다. 〈아미타경〉 〈보현행원찬〉 〈반야심경〉 등 일본에 전래한 범문 원전도 수집했다. 그런데 보현행원찬 이외의 텍스트는, 근대가 되어 막스 뮬러나 난죠 분유우(南條文雄)에 의해 연구, 간행되었지만 보현행원찬만이 남아 있어 이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가이쿄쿠는 로이만 교수 및 네팔 왕립도서관을 조사한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의 벤돌(Cecil Bendall, 1856~1907) 교수의 협력으로, 지운이 전한 일본의 범본과 네팔에 전해진 범본과의 교합(校合)연구를 통해 성과를 올렸다.
그는 인덕에 의해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주었다. 그는 “아내를 맞아 가난한 생활을 하기보다는, 그 돈으로 학생을 돌보고 싶다”며 독신주의를 관철하면서 많은 학생들을 자기 집에서 교육했다. 또 시바중학교 교장을 20년여에 거쳐 맡아, 수많은 학생을 배출했다. 이러한 감화는 해외 사람들에도 미쳤다. 그는 자신의 절에, 인도의 망명지사인 라스ㆍ비하리ㆍ보스를 비롯해, 아시아 각국의 혁명가나 학승을 숨겨 주고, 또 독일이나 러시아의 불교도의 도움도 주었다. 그 때문에 사이코우지는 국제 템플로 불린 적도 있었다. 그의 문하나 제자들은, 사회사업, 교육사업, 학계, 출판계에서 활약했다. 〈불서해설대사전〉으로 유명한 대동출판사(大東出版社)의 창업자, 이와노 신유우(岩野眞雄)도 그의 제자이며, 대동출판사라는 회사명도 가이쿄쿠가 명명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가이쿄쿠를 스승과 들이키는 사람들이 정토종 내 뿐만이 아니라 불교계나 일반사람들 중에도 많이 있는 이유는 그의 인덕 즉 사욕을 방폐한 보살적인 정신에 의하는 곳이 크다.
그의 입적은, 고열에도 불구하고 설날 식전(式典)에 참가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입적 전날은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가 〈타이쇼 신수대장경〉 간행에 대해 보낸 상의 수상식이었다. 다카쿠스 준지로오는 식전에 참가한 뒤, 곧바로 병상의 가이쿄쿠를 찾아, “이 사업은 네 혼자로는 할 수 없었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가 돌아가자 감화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 유고가 편찬 되어 많은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대 아시아주의의 주창자로, 생전 가이쿄쿠와 교류가 있던 도오야마 미쓰루(頭山滿)는 “세상에는 살면서 죽어 있는 사람이 많지만, 가이쿄쿠 스님은 죽어도 살아 있다”고 말했다.
저작에는 〈구미의 불교〉 〈관음경 강화〉가 있다. 유고집으로는 〈코게쯔 전집 : 와타나베 가이쿄쿠 유고집〉 〈코게쯔 카이쿄쿠 상인 시문집〉 〈코게쯔 여영〉 등이 있다.
(참고문헌:세리가와 히로미치 〈와타나베 가이쿄쿠 연구 : 그 사상과 행동〉)
사토오 아츠시 일본 동양대학 동양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불교신문 2236호/ 6월14일자]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7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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