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원운래 (荻原雲来 오기하라 운라이 おぎわら うんらい: 1869.2.10-1937.12.20)
목차
1.적원운래 프로필
2.독일유학 전의 적원운래
1) 학창시절 2) 유학 이년 전(1897년) 3) 유학 1년 전(1898년)
3.독일 유학 중의 적원운래
1) 출발 2) 스승 로이만Ernst Leumann(1859.11.4.-1931.4.24.)에 대하여 3) 스트라스부르크 지역 4) 勉學개시 5) 학문의 진전 6) 켐브리지 대학 방문 7) 학위 수여식
4.독일 유학 후의 적원운래
1) 환영회 2) 적원운래의 학풍과 학자적 태도 3) 출판 및 저서목록 5) 도변해욱K. Watanabe의 전체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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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원운래 환력기념 축하 논문집 사진
발표에 앞서 오기하라 운라이라는 이름의 발음에 대해 말해야겠습니다. 미국 일본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인텃넷 검색 자료 등에는 오기와라 운라이로 되어 있습니다. 일본국어 대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おぎわら[をぎはら]【荻原】-日本国語大辞典
(「おぎはら」とも)姓氏の一つ。
오가와라 또는 오기하라는 성씨의 하나
그러니 오기하라와 오기와라 둘 다 혼용해 써도 무방할 듯 싶습니
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오기하라로 주로 쓰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영진의 글이나 단행본 책그리고 불교신문자료에서는 오기하라 운라이로 적고 있으나 조승미의 글에서는 오기와라로 적고 있습니다. 표기상의 혼란이 있기도 하고 또 다른 이유도 있어 이 발표에서는 적원운래荻原雲来라고 발음하겠습니다.
1.적원운래 荻原雲来 프로필
적원운래荻原雲来(1869-1937)는 화가산和歌山(와카야마) 현県 해부海部군郡 북전변北田邊정町 52번지番地에서 토교유길土橋留吉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幼名)은 죽치랑竹治郞이었다. 호号는 독유独有이다.
아버지를 어릴 때 여의어 열 살 되던 해(1879년)에 어머니와 단둘이 상경하여 당시 정토종 포교布敎의 태두泰斗였던 적원운태荻原雲台(오기하라 운다이)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에 양자로 들여졌다. 이름을 운래雲來로 바꾸었다. 열 네 살 되던 해(1883년, 명치明治 16년)에 복전행계福田行誡(1809-88)로부터 종계宗戒를 수계受戒하여 열일곱 살 되던 해(1886년, 명치19년)에 동경 정토종학 동경지교東京 淨土宗學東京支敎에 입학하였다. 스물여섯 살 되던 해(1895년, 명치28년)에 동경정토종학 동경지교의 교수가 되었다. 서른 살 되던 해(1899년, 명치 32년)에 정토종에서 해외유학 장학금을 받는 첫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 스트라스부르크 Strassburg(당시 독일령, 현재 프랑스령)소재 카이저(황제) 빌헬름 2세 대학으로 유학하여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와 티벳어를 공부하였다. 주로 공부한 것은 로이만 교수 아래 산스크리트어였다.
명치 시기 유럽의 인도문헌학, 산스크리트학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 통감하던 일본불교계는 그것을 이식移植하고자 유학생을 보냈는데 정토종에서는 적원운래를 제 1회 유학생으로 독일 스트라스부르크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적원荻原은 타고난 품성稟性이 냉정冷靜, 과언寡言, 독실篤實하여 공부함에 있어서도 하숙집에 없으면 도서관에 있다 할 정도로 부단히 학업에 정진하였다.
유학할 때의 지도교수였던 에른스트 로이만 Ernst Leumann이 일본인 유학생 중에서도 적원을 유달리 절찬絶讚했던 일은 로이만Leumann 자신이 “적원荻原이야말로 독일의 학풍을 잘 알아(會得) 자신의 심혈을 기울여 스승의 사명을 욕되게 하지 않고 로이만의 학풍을 유유선양愈愈宣揚한 훌륭한 학자”라고 말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평상시에도 ‘보디사트바(보살) 오기하라Bodhisattva Wogihara’로 불리었으니 이로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서른여섯 살 되던 해(1905년, 명치38년)에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은 『유가론瑜家論』 「보살지菩薩地」이다. 학위를 받은 이 해에 6년간(1899-1905)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 후 종교宗教대학교수가 되어 불교범어를 가르치며 다수의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불교학연구실佛敎學硏究室과는 별도로 새롭게 성어학연구실聖語學硏究室을 창설하였다. 그 사이 천초(浅草아사쿠사あさくさ)에 있는 서원사誓願寺 주지 업무를 수행하였고 동경제국대학, 풍산豊山대학, 입정立正대학에 출강하였다.
교육자로서는 지芝(시바しば)중학교교장, 숙덕淑德여학교 교장을 하였으며 68세(1937년)에 사망하였다. 적원운래, 도변해욱渡邊海旭에 이어 로이만(E. Leumann)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신림융정神林隆淨은 그를「일본 불교계의 국보적 인물」「세계 불교학자의 지보至寶(또는 重寶)」라고 불렸다.
저작으로는『실습범어학實習梵語學』『인도불교印度の佛敎』『마하바스투Mahāvastu연구マハーヴァストゥの硏究』가 있고 번역으로는『범화대역무량수경ㆍ아미타경梵和對譯無量壽經ㆍ阿彌陀經』『석가모니성훈집釋迦牟尼聖訓集』(수타니파타Suttanipāata) 『법구경法句經』(岩波文庫)『증지부경전增支部經典』이 있다.
교정에 참여한 것으로는
『범한대역불교사전梵漢對譯佛敎辭典』(Mahāvyutpatti)『범문유가론보살지梵文瑜伽論菩薩地』『범문 야쇼미뜨라(Yaśomitra=稱友)造아비달마구사론梵文ヤショーミトラ造阿毘達磨俱舍論』『범문법화경』『실습범어학』이 있고
유고집으로는 『荻原雲來文集』이 있고, 사후 완성(1978年, 昭和53)된 것으로는 『梵和大辞典』이 있다.
무엇보다 실증적 수법에서 기반이 되는 원전연구와 교정본의 질과 양에 있어서 오기하라를 능가하는 자는 현재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2. 독일유학(1899년) 전의 荻原雲來
1) 학창시절
적원은 정토종학 동경지교를 졸업 후 스승이자 양아버지인 荻原雲台가 교편을 잡고있던 淨土宗學本校에 진학한다. 당시 교장은 흑전진동黑田眞洞(1855-1916)으로 구사론과 정토학을 전문으로 하였고 <<法相以呂波目錄>>과 <<法然上人全集>>을 편찬한 바 있는 사람이다.
이 학교에서 적원운태의 스승은 근식의성勤息義城(1848-1921)인데 그는 發智論, 俱舍論을 강의하였다. 신곡대주神谷大周(1841-1920)도 있는데 그는 전법에 사용되는 텍스트 다섯가지 중 하나인 <<往生記>>대신에 <<選擇集>>을 채용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배척하는 이도 있었다.
또 다른 교수들로는 唯識과 因明을 강의한 대록민성大鹿愍成(1857-1925)이 있고 야상운외野上運外(1867-1945)과 복원융성福原隆成(1872-1931)등이 있다. 대록민성은 교토제국대학에서 唯識과 因明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위 흑전,근식,대록 3인이 구사와 유식을 강의한 것이 적원이 구사론을 공부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 3인의 스승인 性相學의 대가 좌백욱아佐伯旭雅(1828-1891)를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冠導本倶舎論」은 지금도 구사론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보아야하는 길잡이와 같은 책(手引書)이라 하겠고 그의 「名所雜記」(구사론 가운데에서도 난해한 것들을 적출하여 논한 것) 또한 중시되고 있다. 적원이 배운 성상학性相学은 이 佐伯旭雅의 학문 흐름(學流)에 있다고 하겠다.
-적원이 수학 중 勤息義城에게 구사를 배운 이로는 먼저 학습했던 野上運外(1867-1945)와 복원융성福原隆成(1872-1931)을 제외하면 漆間德定(1869-1944), 大谷愍成(1871-1928), 金岡達音(1871-1929)등이 있다.
-종학 본교에서 적원운래보다 두 살 위인 상전관수桑田寬隨(1867-1945)는 유식을, 한 살 위인 임언명林彦明(1868-1945)은 因明을 전문으로 하였다. 적원은 25세 때 임언명과 因明의 三支作法에 관해서 논쟁하여 그의 논문을 1년간 2회 비판을 가하였다. 적원의 논쟁정신은 유학 이후에도 드러난다.
-적원은 동경지교입학 이전에 靑山의 英和 학원에서 영어를 습득하였는데 이런 까닭에 전 학년 중에 그 보다 영어를 잘하는 이가 없었다.
-취미는 트럼프나 장기였다고 한다.
-그는 늘 一心不亂하게 勉强하였다고 전한다.
2) 유학 이년 전(1897년)
이 해에 적원운태荻原雲台가 본교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교수가 된 적원운래는 구사, 종교사, 영어 수업을 담당하며 실론セイロン(Ceylon)王統史에 있는 <<大史 >> 번역을 팔리어 원전이 아닌 영역된 것을 중역하는 방법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팔리어를 할 수 있는 이로는 석흥연釋興然(1849-1924)이 있었다. 흥연은 하구혜해河口慧海에게서 팔리어를 배웠다. 이런 사실로 볼 때 당시 적원운래는 팔리어를 몰랐던 것으로 짐작된다.
1897년 고남순차랑高楠順次郞이 귀국하였다. 이 해에 동급생인 도변해욱渡邊海旭은 고래의 구구번쇄한 해석을 일소하고 聖典원문에 근거한 불교연구를 하자고 제안하는 센세이셔날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3) 유학 1년 전(1898년)
동경제국대학의 자기정치姉崎正治가 정토종본교에 출강하여 인도사, 종교사를 가르쳤고 고남순차랑高楠順次郞 역시 <<金七十論>>의 梵本을 강의하였다. 이 강의로 인해 적원이 더욱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정치나 고남순차랑 이 두 사람은 독일에서 유학할 때에 도이센P.Deussen에게서 사사하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3. 독일유학 중의 적원운래
1) 출발
1899년 9월 정토종으로부터 급비를 받는 유학생이 된 적원은 고남순차랑의 소개장을 가지고 로이만(Ernst Leumann 1859-1931)의 허락 하에 요꼬하마에서 젝센 호를 타고 출발하였다. 로이만의 허락을 얻는 데에는 고남순차랑의 소개로 노이만 아래에서 유학하였던 상반정요유常磐井堯猷의 역할이 있었다.
2) 스승 로이만Ernst Leumann(1859.11.4.-1931.4.24)에 대하여
스위스 출신(후에 독일로 귀화)인 로이만은 인도유럽 언어를 공부하였고 그의 전공은 자이나교Jain 문학과 호탄(우전국) 필본들 Khotanese manuscripts이었다. 그는 1859년 11월 4일 스위스 베르크Berg, Switzerland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네바, 쮜리히, 라이프찌히 Geneva, Zurich ,Leipzig대학에서 공부를 하였고 1880년에는 베를린으로 갔다. 1년 후인 1881년 라이프찌히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 주제는 편집된 자이나 텍스트인 아우파티카 수트라Aupapatika Sutra였다. 이 편집본은 그 당시에는 이용할 수 있는 중요한 사전이나 문법서가 없었기에 놀라운 성과였다. 출판된 자이나 경전도 없었다.
로이만은 필본만을 가지고 베를린에서 공부하였던 것이다.1882년부터 1884년까지 옥스포드 대학 인도학 교수 모니에-윌리암스(Monier-Williams.1819.11.12 – 11 April 1899.4.11.인도 봄베이 출생)의 초청으로 당지에 체재하면서 범영사전Sanskrit-English Dictionary개정판 작업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 로이만은 영국 유학중인 남조문웅南條文雄과 만났다고 전해진다.
자이나교 연구로 학위를 취득하였다.
베를린 시절에 알게 된 피아니스트와 결혼하여 두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각각 마누Manu와 하리Hari라고 범어에서 비롯하는 이름을 지었다. 도변해욱은 부인의 연주를 들은 적 있다고 말하였다. 자기정치도 로이만이 인도음악에 관한 古등본을 손에 넣었는데 부인이 그것을 피아노로 치는 것을 들은 바 있다고 말하였다.
1884년(그의 나이 26세)에서 1897년까지 그는 독일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에서 교수로 있었다. 1919년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스트라스부르크를 떠나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 정착하여 사망할 때(1931년)까지 머물렀다. 그는 1931년 4월24일 사망하였다.
로이만은 자이나 경전들에 담긴 전설과 이야기들을 철학적 관점에서 비교하고 고찰하였다. 그는 1892년에 다사바이카리카Daśavaikālika sūtra와 니류크티Niryukti를 편집하였다. 그는 많은 자이나 버젼의 이야기들이 자이나 문학뿐만 아니라 인도 문화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만년에 로이만은 호탄 텍스트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로이만의 견해로는 이 텍스트들의 언어가 북 아리안 계로서 산스크리트에 가까운 언어라는 것인데 이는 그것들이 사카스Sakas(이란에서 기원하는 스키타이 종족) 언어일 것이라고 여기는 학자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가 아니었다.
로이만의 주요저작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ur nordarischen Sprache und Literatur ("북 아리안 언어와 문학에 대하여"), 1912;
Maitreyasamhita, 1919;
Neue Metrik I, 1920; Buddhistische Literatur, Nordarisch und Deutsch ("불교 문학과 북부 아리안과 독일) , 1920;
Buddha und Mahavira, 1922;
Die nordarischen Abschnitte der Adhyardhaśatikā Prajñāpāramitā ("이취경의 북부 아리안 문장들"), 1930.
적원은 노이만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로이만 교수는 이 때 42세로 그의 나이 24세 때 모니에 윌리암스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가 1년 반동안 범영사전 작업을 도왔으며 귀국 후에도 5년간 분담한 일을 수행하여 윌리암스 범영자전이 나오게 되었는 바 그 자전의 오늘 날의 명성은 이에 기인하는 바 크다. 노이만 선생은 26세에 이미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의 조교수로 된 것을 볼 때 그 학식의 비범함을 알 수 있다”
3) 스트라스부르크 지역
-적원은 스트라스부르크 도착 후 백부 土橋丈三郞에게 편지(1899년 11월)를 하였는데 도로가 모두 돌로 포장되어 있고 전기철도와 마차가 지나다닌다고 쓰고 있다.
-적원은 시외 閑靜한 가옥의 一室을 빌러 생활하였다.
-스트라스부르크는 17세기까지는 신성로마제국에 그 후 태양왕 루이 14세 때에는 프랑스에 병합되었고,그 후 1870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령으로 있었다.1차 세계대전 후에는 독일,2차세계대전 후에는 프랑스에 속하게 되었다. 142미터 되는 고딕양식의 대성당이 있어 도변해욱은 해질 무렵 탑의 우측에서 하늘을 보면 그림을 그려놓은 듯 미관이 좋아 숭고미묘한 감정이 생긴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 학업이 진전되었을 때에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20리 떨어진 숲(黑林)에 작은 농가를 임차하여 그 곳에서 휴가를 보내기도 하고 적원과 도해 등 4인이 로이만이 사는 시골집에 방문한 적도 있다. 선생이 환대하는 가운데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두 명의 영식은 그들이 수집한 각종 곤충 표본들을 보여주며 모충이 나비가 되는 과정을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로이만은 딸에게 먼 곳에서 귀한 손님이 왔으니 이 지역의 盛裝을 보여주라고 해 이 지역 처녀들이 혼례 때에 입는 원통형의 花冠에 각색의 綵華玻璃로 장식된 옷을 그 딸이 입고 나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4) 勉學개시
-적원은 독일어 字書는 근근이 읽을 정도이나 독일어談話는 區分了解하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로이만과 얘기를 나눈 뒤 독일어 회화, 문법, 작문을 연습하여 실력을 축적하였다고 전한다.
-다음 해 3월에는 이국만리에 있지만 집에서 책을 읽고 있는 한 본국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와 다를 바 없다고 본국에 소식을 전하였다.
-유학 당초부터 시작된 로이만 교수의 수업과목은 다음과 같다.
1899년 12월-1900년 2월
범문전초보 Elementarbuch der Sanskrit-Sprache von Stenzler(스텐츨러의 이 책은 일본에서 적원의 문법서가 출판되기까지 사용된 바 있다)
嘉訓 Hitopadesa(인도 민화 잠언집인데 적원이 가훈이라고 번역한 바 그 묘미가 있다)
그리고 별도로 로이박 박사의 자택에서 범어를 연습하였다.
1900년 4월~8월
Bhartrihari, Satakatrayam
불소행찬 Buddhacarita
1900년 11월-1901년 3월
범문典연습
하력폐타荷力吠陀 Rig-Veda
雲의 使い Megha-dhuta
士의 小車 Mricchakatika
Divyavadana
Dharmasastra by Manu
Pali-Sprache
1901년 4월-10월
금칠십론범문 Sankhyakarika
Sakuntala
荷力吠陀
팔리 본생경초록
수업내용은 베다,인도문학,철학,팔리어,불교범어 등 다채로웠다.
불전으로는 마명이 지은 <<붓타 차리타>>가 있었다.
-적원이 유학한 이듬해인 1900년 7월 17일에는 도변해욱渡邊海旭이 스트라스부르크에 도착하였다.
5) 학문의 진전
도변은 이렇게 적고 있다.
'대학에 가서 독유와 함께 오후에는 <대장엄경>범본의 연구를 하였다. 독유가 한역을 읽으면 스승 로이만이 논강을 하였는데 難句가 있으면 一頌에 한시간을 소비하기도 하였다.'
1902년 9월 7일부터 4일간 함부르크에서 열린 만국동양학회 (International Oriental Congress)에 적원, 도변은 로이만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 학회에는 적원,도변,자기를 포함해 9명의 일본인이 참석하였다. 적원은 정토종 고등학원교수의 자격으로 참가하여 한역불전의 一問題를 발표하였다.
적원은 벤달Cecil Bendall과 공역한 <<욱가경郁迦經>>을 출판, 그와 병행하여 <<대품반야경>>의 주석의 교정본 출판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적원은 <<팔천頌 반야경>>의 이론서 <<現觀장엄론>> 교정을 마치고 이어서 <<유가론>> 보살지를 출판하겠다고 결의하였다.
유학기간은 일본에서 출발하였을 때에는 4년을 잡고 있었으나 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되지 않은 까닭에 본국 종단에 적원과 도변은 연장신청을 하였다. 연장 신청서에는 로이만의 증명서가 첨부되었다.
6) 켐브리지 대학 방문
1903년 12월 28일 스트라스부르크를 출발하여 29일 밤에 영국 켐브리지(劒橋)에 도착하였다. 벤달Cecil Bendall의 허락 하에 瑜伽梵文을 등사하였다. 체재기간은 2개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켐브리지의 제복과 制帽가 인상적이었는지 모자가 일본에 비해 크고 교수들도 제복을 입는다고 언급 하였다. 정토교보에 실린 글에 보면 오전 아홉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식사시간 30분을 제하고는 등사를 하였다는 얘기가 나온다. 유가론 貝葉은 1천여년 전의 것으로 흠결된 것도 있고 마모된 것도 있으나 유가에서는 다행히도 번역의 왕 현장삼장의 정묘한 한역이 있어 대조하여 글 뜻을 통창通暢할 수 있었다고 적기도 하였다.
적원은 켐브리지에서 2개월 지나고 난 뒤 리스 데이비스T. W. Rhys Davids(1843~1922)의 요청으로 런던에서 그를 만났다.
7) 학위 수여식
정토종교보에 실린 바에 따르면 적원에게 애초 학위는 안중에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진정한 학자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1905년 8월 1일 적원은 로이만 선생의 거듭되는 권고에 마지못해 형식적으로라도 '닥터'시험을 치르기로 하고 山高모자와 프록코트를 입고 응시하였다.
적원의 학위논문인 유가론 보살지의 校訂은 쉽지 않았다. 캠브리지 도서관에서 한역 유가론과 천년 전의 古패엽을 對校하여 놀라운 수완을 발휘하여 범본의 흠결을 보충하고 난해한 구절을 풀고 오염으로 퇴적된 葉片들을 정리하는 기량은 지극한 데가 있어 백미호발의 노대가들도 혀를 내두르며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리스 데이비스도 그 공적을 높이 사 절찬하였다고 한다. 로이만 역시 적원의 박사논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박사 논문 심사가 있던 날 논문이 통과되자 당일 밤에는 축하연이 열렸다. 대학 앞의 대요리점 게르마니아의 별실에서 성대하게 축하연이 열렸는데 도변은 환희열락으로 들떠 있었고 로이만 선생은 권배를 하면서 독유의 6년간(일본에 귀국한 뒤 어떤 이는 이것을 부처님 고행 6년에 비교하기도 하였다)의 精學을 침이 마르도록 賞嘆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유가론 범문 출판에 관한 전말과 적원이 그간 苦學蘊蓄한 것을 친절하게 기록한 인쇄물을 참석한 모두에게 돌렸다. 더구나 널리 구주학단의 동료에게도 배포하였다. 이런 후의는 특별히 이례적인 일일 것인데, 제자의 박사취득을 축하하며 이토록 두터운 호의를 베푸는 것은 어디에도 그 동류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4. 독일 유학 후의 적원운래
1) 환영회
적원은 1905년 8월 이탈리아의 제노아에서 배를 타고 귀국하였다. 정토종 교보에는 그의 귀국을 알리는 소식 곧 10월 8일 요꼬하마横浜 도착이라는 소식이 실렸다. 1905년 4월 정토종대학학장으로 취임한 흑전진동은 적원의 귀국을 정토종 승려들에게 알리며 환영하는 글을 거기에 올렸다.
귀국한 적원은 정토종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유학 가기 전에 하던 일이긴 하나 닥터 필로소피를 갖고 있는 점이 다르다 할 것이다. 환영회는 흑전, 정원 양씨가 청국 종교 시찰을 하러 떠날 것이기에 송별회를 겸한 것이었다.
동경에 돌아가서도 환영회가 다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축가와 축사, 헹가래와 만세제창이 이어졌다.
그 다음날 知恩院 祖廟에 參拜하였다. 이어 茶話會에 참석하였고 이 모임은 정토종만세를 제창하고 적원의 건강을 축원하며 오후 5시경에 끝났다.
정토종 대학에서의 강연한 구체적 내용은 <<淨土敎報>>에 실려 있는데 첫째 불교의 역사적 내력을 아는 일 둘째 번역의 뜻이 불명료한 것을 명료하게 하는 일 셋째 번역의 오류를 바로 잡는 일 넷째 언어학上의 이익이라고 한다.
의대교수와 재독학우 등이 개최한 교토호텔에서 열린 만찬회도 있었다.
이후 연일 귀국과 관련된 모임에 참석하였다. 10월 16일에야 그가 태어난 고향인 화가산에 토교 家의 무덤에 참배하였다.
京都(교토)대학 환영식이 있었다. 이 환영회에서는 적원이 유학한 6년은 붓다가 수행한 기간과 같으며 그 고행의 결과 철학박사 학위를 얻었다는 말까지 있었다. 이 환영회는 적원이 먼저 불전 앞에 삼배를 하고 범어연구의 가치에 관한 강연을 한 뒤 착석을 하였고 간주악이 흐르고 총원이 기립하여 '기미가요君が代'를 삼창하고 학생총대표의 개회사가 있은 뒤 축사 연설 등이 이어지며 끝났다. 경도(교토)의 환영회의 주최자는 영국에 유학하였던 大谷敎校의 南條文雄, 적원과 도변이 독일에서 만난 적 있는 姉崎正治, 정토종 대학장 黑田眞洞 3인이었다.
2) 적원운래의 학풍과 학자적 태도
적원의 스승은 포교의 태두였던 정토종 동경지교(후에 본교의 교장) 교수인 적원운태였다. 적원은 이 학교에 입학하였고 후에 본교에 진학하였다. 거기에서 후에 삼우오(三羽烏)라 불리게 되는 도변해욱(와타나베 가이교꾸)과 망월신형望月信亨과 동급생이 된다. 적원이 불문에 든 것은 10세, 도변은 14세, 망월은 십일세였다. 정토종 해외유학생 제도가 발족하여 적원이 뽑혔을 때 스승인 적원운태는 ‘持戒堅固’히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도변은 적원이 학문 방면에서 원숙하고 도덕 방면에서도 유별나게 모범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한다. 온후한 풍모, 겸양의 덕, 진지함이 배어있다고 말하고 있다. 姉崎正治는 ‘묵묵히 靜坐하여 올연兀然히 독서하고 집필하는 모습이 적원에 대한 나의 인상에 남아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유학하여 의학을 공부하던 일본인은 그를 ‘군자’라 호칭하였다.
의학생 足立文太郞은 로이만 교수가 斷片들을 가지고 적원의 방에 가면 적원은 상자에서 縮刷藏經을 꺼내어 설명을 하고 교수가 납득이 되어 돌아가곤 하는 것이 定例였다고 말하였다.(적원운래문집 134頁)
로이만의 학풍과 생활태도와 적원의 그것은 무척 흡사했다고도 전한다.
-적원 자신이 구사론 주석을 교정하면서 구사론을 ‘학자의 장난감玩弄物’이라고 말한 바 있다. 러시아의 체르바츠키(Fyodor Ippolitovich Shcherbatskoy 또는 Stcherbatsky, 1866.10.1 – 1942.3.18)가 영국, 독일, 벨기에의 학자가 구사론 연구를 국제적 프로젝트로 하자는 발안을 한 바 있다. 그 후 구사론 원전을 중심으로 한 많은 업적들이 속속 나왔다. 학자의 장난감이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적원의 이 말은 구사론의 주석에 주석이 이어져 민중과 유리된 면을 지적하여 나온 것이기도 하다.
-적원은 한편으로 <<반야경>>의 방대한 주석서<<현관장엄론>>의 교정을 수행하였다.
적원의 연구분야는 <<법구경>>(니까야), 아비달마(<<구사론>>주석서의 교정번역), 중관(<<현관장엄론>>), 유식(<<유마경>> 보살지)등 불교학의 대동맥을 망라하고 있다.
-로이만이 수업에서 다뤘던 불전으로는 대승의 마명이 지은 <<붓다 차리타>>가 있었다.
붓타차리타의 사본은 당초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었고 막스 뮐러가 영국유학중인 입원연수(笠原硏壽 가사하라 겐쥬우)에게 파리에 건너가 書寫하게 한 일도 있다.(笠原硏壽는 불면불휴로 서사하다가 이것이 체력조절에 탈이 난 遠因이 되기도 하였다)
-적원은 학문에 있어서 엄격한 자세를 취했고 타인의 연구를 향해서도 그러하였다. 반론이 있을 경우 두 번 세 번 비판을 더하였다. 그리하여 그 논쟁은 더욱 격렬해져갔다. 高野山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長谷部隆諦(1879-1928)의 저서<<般若理趣経和訳>>이 출판되자 이에 대해 엄정한 비판을 가했는데 두 번째 비판의 말미에는 ‘도兜를 脫하여 항복(降參)하기를.......多罪多罪’라고 적기도 하였다. 비판을 받은 長谷部 씨는 다시 인도로 건너가 실의에 빠진 채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교토제국대학의 교수와도 범문에 나오는 인명 지리 교리에 관해 논쟁을 거듭한 적 있었다.
-귀국 후 종교대학 교수가 되어 산스크리트어, 티벳어, 팔리어, 독일어 강의를 시작하였다. 종교대학에 불교학연구실이 있었지만 불교 기초 연구와 국제적 학술에 공헌하기 위해 별도로 聖語학연구실을 세웠다.
지학원 교장, 숙덕고등여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천초 서원사 주지직을 귀국 직후부터 맡았다. 사회사업에도 도변해욱, 矢吹慶輝등과 함께 힘썼다. 사회사업은 도변해욱의 강한 영향이 있었지만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을 사회적으로 실천한다는 측면도 있었다.
3) 출판 및 저서목록
다수의 불전을 교정 출판하거나 번역하였다. 그 외 범어문법서 출판이 있다. 범어의 기본적 문법서는 스텐츨러Stenzler(1807-1887)의 <<梵文典 初步elementarbuch der sanskrit-sprache von Stenzler>>가 있었지만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의 <<巴利語佛敎講本>>같은 예문과 문법 색인에 있어 풍부하고 간편한 책의 수요가 있어 <<실습범어학>>1916년 출판하였다. 이 책은 나중에 1974년 십직사랑辻直四郞의<<범어문법>>이 나올 때까지 약 60년간 지속된 중요한 보물과 같은 책이다. 참고로 신량삼랑榊亮三郎의<< (解說)梵語學>>이 1912년에 간행된 바 있다.
범어사전 출판도 기획하였다. 당시 종교대학의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은 학회의 총력을 기울여 불교사전(후에 <<망월불교대사전>>이라 한 책)을 편찬하고 있었다. 처음 계획은 뵈틀링크Otto von Böhtlingk (May 30, 1815 – April 1, 1904)의 범독사전을 모범으로 삼아 계획하였다고 한다. 1978년에 그것은 후학들에 의해 완성된다.
-영어로 작성한 글은 두 개가 있는데 그 제목은 아래와 같다.(적원운래문집 175,854쪽에 각각 실려있음)
Vasubandhu
The Term Sahampati
-일본불교학협회연보(동국대 소장)에 <무량의란 무엇인가>, <현관장엄론에 대하여> 등을 발표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적원운래문집에 들어 있음)
-중국에서 나온 楊曾文 등이 지은 <<일본 근현대 불교사>>라는 책 395-6쪽에서 적원운래를 소개하고 있는데 마지막 줄에서 여징呂澄이 <<인도불교 사략>>에서 적원운래의 학설에 덧붙혀 소개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적원운래 저서 목록
①實習梵語學 (1916년 4월 초판)
이 책은 범어 초학자에게 지침이 되는 책이다. 처음에는 「범어입문」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으나 증가 정정하였고 권말에 각종 범문불전을 뽑아 실었다.
梵漢對譯佛敎辭典』(Mahāvyutpatti)
통상 번역명의대집이라 부르는 것이다. 적원운래의 위 책은 범문과 티벳 그리고 한어와 몽고어 역을 대조하고 러시아에서 출판된 것을 기초로 하여 그 오류를 바로잡아 한역어를 저자가 추가하여 종교계라는 잡지에 연재한 것을 후에 일괄하여 출판한 불교어휘집이다.
印度の佛敎
저자는 독일유학 전에 인도불교사를 전공하였다. 본서는 당시에 연구한 것과 그 후 습득한 것을 집대성하여 「불교대관」십편 중 제 이편으로 출판한 것이다.
梵藏和英合璧淨土三部經 -梵和對譯無量壽經,阿彌陀經
막스 뮐러와 남조문웅 공저한 범문 무량수경을 한어와 티벳어 번역을 정밀하게 대조하여 종교계라는 잡지에 연재한 것을 다시 수정하여 간행한 것이다. 범본 무량수경본문과 하구혜해의 티벳어 대조 번역 무량수경과 고남순차랑의 영역 정토삼부경을 합책하여 출판하였다.
大藏經南條目錄補正索引-常盤大定, 美濃晃順 兩師 共著
남조문웅의 세계적 명저인 영역 대명삼장성교목록이 남조문웅박사 기념간행회에서 사진판으로 재간행할 때에 적원이 경전 범명의 보정을 담당하였다.
梵文瑜伽師地論菩薩地
미륵이 설한 것을 무착이 지었다고 칭해지는 유가사지론 백권은 유식 중도 아뢰야 연기론이 대성하던 시대의 산물이다. 유가사지론 가운데 보살지라 칭하는 것의 범본은 적원이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1904년 그가 유학 중 우연히 1883년에 나온 세실 벤달 Bendall의 「캠브리지대학 도서관소장 불교 범본 목록」을 보고 1702번에 bodhisatva-bhumi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조속히 캠브리지대학으로 가 한역 현장역 유가사지론 보살지와 대조하여 상응하는 것을 알고는 벤달 교수의 허락 하에 순서가 부동하고 지리멸렬한 貝多羅葉을 배열정리하고 그것을 書寫하여 돌아왔다. 1930년이 되어서야 사재를 털어 티벳역을 참조하여 그 전반을 일책(188쪽)으로 출판하였다. 후반 제 2책은 구주 학자의 독촉이 잦았는 바 1936년 초에 완성되어 학계에 다대한 편의를 제공하게 되었다. 위 책에서는 적원의 독일어 박사논문을 첨가하였다.
梵文稱友造阿毘達磨俱舍論疏
(Yasomitra’s Sphutartha Abhidharmakosa-vyakhya)
세친이 경부사의 입장에서 비바사사의 설을 비판하여 지은 아비달마구사론은 소승불교의 대표적 綱要書로 인도 서역 서장 지나 조선 일본 등 북방불교 1500년 동안 불학자들이 귀히 여겨 탐구해온 바 있다. 주석서도 심히 많지만 번쇄하여 원저자의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적원이 출판한 칭우 작 범문구사론소는 결점을 없애 본서는 구사론 연구에 있어 一 新時期를 그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의 제3장 세간품은 푸생이 1934-35년에 출판한 것이고 제1장은 레비가 1918년에 간행한 것이나 나머지 출판은 적원에게 의뢰하여 적원은 캘커타 사본을 手寫하여 남조문웅이 手寫한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본을 교합하고 다시 티벳역을 참조하여 오랜 시간 노력하여 교정을 거듭하여 출판하게 된 것이다. 1932년 우송원제가 범문구사론소 간행회를 설립하여 4년이 지난 1935년에야 전부가 출판완성하게 되었다.
稱友造阿毘達磨俱舍論疏和譯
품계는 적원 자신이 번역하였고 근품 이하는 山口益과 공역하기로 하였으나 적원의 사망으로 그러지 못하다 근품 이하가 산구익에 의해 번역이 완성되어 출판하였다.
梵文現觀莊嚴(論)より見たる般若바라밀다釋(범문현관장엄론에서 본 반야바라밀다 석)
(Abhisamayalamkar,aloka-prajnaparamita-vyakhya)
師子賢(Haribhadra)의 般若釋論은 慈氏主(Maitreyanatha=미륵)의 現觀莊嚴論에 의거하여 팔천송반야를 釋한 것이다. 現觀莊嚴論은 2만5천송 반야를 一乘家의 견지에서 科判하여 자신의 宗義에 따라 新見地를 개척하였다. 이 논의 티벳본은 존재하지만 한역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본서는 적원이 독일유학 중 로이만 교수를 통해서 레비 교수의 사본을 빌려 書寫한 것을 티벳 역과 대조하여 원고가 작성되었으나 1932년 가을에서야 8천송반야의 범문에 이 주석을 더해 동양문고에서 제1분책으로 간행되었다. 차례로 잔여 6분책이 간행되어 1935년 가을에 사육배판 본문 약 천 쪽의 책이 완성되었다.
개정 범문법화경(Saddharmapundarika-sutra)
범문 법화경은 남조분유가 화란의 케른 박사와 함께 여섯종의 사본을 교합하여 출판한 적이 있다. 적원은 다년간 범문 법화경을 강독하며 교정이 불충분한 것이 많고 송문의 운율이 불비한 점을 간취하여 시정하였다. 하구혜해의 범본을 참조하고 티벳역과 한역을 참고하여 로마자로 출판하였다.
釋迦牟尼聖訓集
南傳經集(sutanipata)은 불타의 성훈을 모은 것으로 일체의 경전중 가장 오래된 것을 다수 포함하고 있는데 불탄2천5백년을 기념하여 번역출판되었다.
법구경(Dhammapada)和譯
먼저 잡지 종교계에 신역법구경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것을 수정하여 주석을 붙이어 岩波문고중 하나로 출판되었다.
南傳大藏經增支部經典 一 二 三 四(前半)
고남순차랑 박사 공적기념회에서 남전의 일체경을 번역출판할 계획이 있어 적원은 증지부 經典과 經集과 義釋의 번역을 담당하였다.
범화대사전의 편찬
1930년 이래 외무성 對支문화사업부의 원조 하에 적원운래를 중심으로 편찬중인 사전으로 원고는 이미 완성을 보았고 현재 인쇄출판의 실현을 위해 간행회에서는 고심 노력 중이다. 이 사전은 범영사전을 底本으로 삼아 한역어를 추출 첨가하여 일본 최초로 범화대사전을 학계에 제공하게 될 것이다.
5) 도변해욱K. Watanabe의 전체적 평가
적원은 6년간의 유학동안 자신을 위대한 학자로 완벽하게 만들었다. 한역 불전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에 더해 그의 스승인 로이만의 정확하고도 엄격한 조사방법을 체화하여 한역과 원전 대조 연구에 있어 자신을 가장 뛰어나게 만들었다. 이런 방법으로 불교 범어문을 명료화하는데 그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를 유럽학계에 명성을 갖게 하였다.
켐브리지 대학의 교수 세실 벤달 Cecil Bendall은 大乘集菩薩學論[대승집보살학론, Siksasamuccaya] 편집에 있어 처음부터 적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런 도움이 되는 작업 덕분에 그는 극동의 젊은 승려 출신의 학자로서 리스 데이비스 부부 Prof. and Mrs. Rhys Davids, Rudolf Hoernlé, Louis de La Vallée Poussin, Luders 등으로부터 상찬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입지를 구축하게 된 것은 켐브리지 대학에 있던 산스크리트 유가론 보살지 Bodhisattvabhumi를 정리한 데에 있다. 한전에 의지하여 난삽하게 있던 자료들을 완전하게 재배열한 것이다. 이 일은 로이만 교수에게도 자랑이 되었다...
적원은 일본에 돌아와서도 불교 범어 한길에 일로매진하였다. 그는 여러 대학에서 교수를 하며 학생들에게 자상하였고 그러면서도 정확하고 세밀한 방법들을 전수하여 주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스승 로이만의 판박이라고 할 수 있다.
1923년 동경대지진 시 그가 애써 모았던 자료들과 노트들이 불에 타 없어지게 되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연구에 매진하였다. 이런 숭고한 태도와 완전한 학자정신은 위대한 학자들에게 더욱 존경받게 하였다.
그는 오로지 불교 범어 연구를 신성한 의무로 여기고 깊고도 정확하게 조사하여 그의 연구에서 어디 하나 불명료한 것이 없게 만들었다. 국내외를 통틀어 그의 연구영역에서 그를 압도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조분유도 그의 의견에 많은 부분 귀를 기울이며 란카바타라 경 Lankavatara sutra(楞伽經)편집에 임하였다. 레비levi교수는 그가 구상하고 있던 칭우의 아비달마 구사론 출판을 적원에게 맡길 정도였다. 최근 난조 카탈로그를 일본어 알파벳 순서로 인덱스를 재작업함에 있어 적원은 난조가 잘못 달은 제목들을 모두 제대로 회복하였다. 그는 범화 사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는 Otto von Böhtlingk와 Roth의 지위에 그를 올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 승려로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이례적인 것이겠지만 서양의 저명한 학자들이 박사 수여 25주년 50주년 하며 연구의 심화에 자극제가 되도록 축하해주는 것처럼 우리가 적원의 환갑을 이렇게 기념하는 것은 뜻 깊은 일일 것이다. 국내외의 여러 학자들이 우리가 놀라 정도로 신속히 이 일에 참여해준 일 또한 놀라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