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의 원음일연에 관하여
1.서론
대승기신론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말하자면 부처님이 살아계셨을 때에는 듣는 이들이 더 잘 알아들었고 말하는 이도 안 밖의 일에 뛰어났기에 원음일연圓音一演하면 이류등해異類等解하여 곧 논論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所謂如來在世,眾生利根,能說之人色心業勝,圓音一演,異類等解,則不須論。
인순법사法師는 대승기신론 강기에서 이 부분(교재42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圓音一演,異類等解’라는 것은 유마경에서 말한 “佛以一音演說法,眾生隨類各得解”와 같다.
원음은 곧 일음이다. 일음은 그 평등을 말하고 원음은 그 원만을 말한다. 부처님의 원만한 음성은 성품에 맞춰 흘러나오기에 중생의 근기와 수행이 같지 않음에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마음에 맞춰 법을 설하니 중생이 근기에 맞춰 알아듣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원음에 대해 옛 사람들은 두 가지 해석을 하고 있었다.
一.구마라집의 설
부처님의 일음은 평등음이다. 아울려 무차별이다. 부처님의 음성은 평등무차별이지만 중생의 근기와 수행에 큼과 작음, 날카로움과 무딤이 있는 까닭에 번뇌에 가벼움과 무거움, 두터움과 엷음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중생이 마음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저마다 다른 교상을 나타낸다. 다만 모두 그 알맞음에 적절히 합치하여 바르게 해석한다.
二.보리유지의 설
부처님의 음성은 일체 음성을 모두 갖춘다. 비록 일체 음성을 모두 갖추었지만 다만 음성이 여전히 일미 평등한 것이다. 부처님의 일음이 원만하여 일체 음성을 포함하는 까닭에 중생은 각자가 필요한 무엇에 따른다. 곧 부처님의 말씀 중에 있는 무엇을 듣고는 무엇을 요해한다.
‘圓音一演,異類等解’,與維摩經的“佛以一音演說法,眾生隨類各得解”相同。圓音,即一音。一音,是說他的平等;圓音,是說他的圓滿。佛的圓滿音聲,稱性流出,眾生根行雖不等,但都能有所了解。這即是說,佛稱心而說法,眾生稱機而得益。佛的圓音,古人有二解:一、鳩摩羅什說:佛的一音即平等音,並無差別。佛的音聲,雖平等無差別,然因眾生的根行有大小利鈍,煩惱有輕重厚薄的不同,所以於眾生的心解中,現起不一樣的教相;但都能適合其宜而得正解。二、菩提流支說:佛的音聲,具足一切音聲;雖具足一切音聲,但音聲還是一味平等的。因佛的一音是圓滿而包含一切音聲的,所以眾生隨各自所需要的什麼,即聞到什麼,了解什麼。
원음일연을 말하기 위해서 인순법사는 위와 같이 구마라집과 보리유지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인순스님은 대승기신론은 두 번째 보리유지의 설을 취한다고 곧 이어 밝히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 라는 질문에 앞서 대승기신론이 후자의 설을 취한다는 부분도 아래에 인용해 번역해둔다.
대승기신론은 마땅하게도 보리유지의 해설을 채용한다.
이는 꽃이 빨강과 노랑과 보라 빛깔의 차이를 갖는 것과 같다. 이런 갖가지 빛깔은 사실상 모두 햇빛이 비춰서야 나타나는 것이다. 해는 보건대 흰 빛깔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빛깔을 함유하고 있다. 다만 뒤섞인 채 한 빛깔(곧 흰 빛깔)로 보인다. 풀꽃은 모두 갖가지 색소를 가져 햇빛이 비추게 되어서야 빨강 노랑 등의 다른 빛깔이 된다. 이는 부처님의 음성이 비록 일미 평등이지만 햇빛이 갖가지 빛깔을 갖췄듯이 일음이 실제로는 일체 음성을 모두 갖춘 것과 같다. 중생은 근기 차이에 따라 요해하는바 또한 같지 않다. 곧 풀꽃이 색소 성능의 차이 때문에 각기 다른 빛깔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本論應用菩提流支的解說。這如花有紅、黃、藍、白色的不同,這些不同的顏色,真正說來,都是因太陽光照而顯出的。太陽,看來是白色的,而實含有一切釆色,不過混融而現為一色吧了。花草都有不同的受色素,經太陽的照射,這才成為紅黃等不同的顏色。這如佛的音聲,雖一味平等,然一音實具有一切音聲,如日光的具種種色。眾生隨根機不同,而所了解的也不同;即如花草因受色素的性能不同,而顯出各別的顏色來。
위의 인용 해석된 문장 내용을 다음 본론에서 구체적으로 살피기로 한다.
2.본론
다시 한 번 양설을 적는다.
一.구마라집의 설
부처님의 일음은 평등음이다. 아울려 무차별이다. 부처님의 음성은 평등무차별이지만 중생의 근기와 수행에 큼과 작음, 날카로움과 무딤이 있는 까닭에 번뇌에 가벼움과 무거움, 두터움과 엷음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중생이 마음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저마다 다른 교상을 나타낸다. 다만 모두 그 알맞음에 적절히 합치하여 바르게 해석한다.
一、鳩摩羅什說:佛的一音即平等音,並無差別。佛的音聲,雖平等無差別,然因眾生的根行有大小利鈍,煩惱有輕重厚薄的不同,所以於眾生的心解中,現起不一樣的教相;但都能適合其宜而得正解。
二.보리유지의 설
부처님의 음성은 일체 음성을 모두 갖춘다. 비록 일체 음성을 모두 갖추었지만 다만 음성이 여전히 일미 평등한 것이다. 부처님의 일음이 원만하여 일체 음성을 포함하는 까닭에 중생은 각자가 필요한 무엇에 따른다. 곧 부처님의 말씀 중에 있는 무엇을 듣고는 무엇을 요해한다.
二、菩提流支說:佛的音聲,具足一切音聲;雖具足一切音聲,但音聲還是一味平等的。因佛的一音是圓滿而包含一切音聲的,所以眾生隨各自所需要的什麼,即聞到什麼,了解什麼。
위 두 설을 문장 상에서 살펴볼 때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부처님의 음성이 평등하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그리고 중생의 근기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부처님의 음성이 일체 음성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있어서는 양자가 차이를 보인다. 없다고 보는 구마라집의 경우가 대개 상식적인 답변일 것이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은 원음 또는 일음이 일체 음성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보리유지의 설을 따른다고 한다. 또한 교상이라는 단어가 있고 없는 차이가 보인다.
1)일음과 음성
우선 일음과 음성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이하 백진순이 번역하고 해제를 앞에 단 원측의 <<해심밀경소 제1서품>> ‘해심밀경소 해제’에 기초해 그 글들을 인용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일음에 대해 말하면 “이 일음의 문제는 이미 초기 불교도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고 한다. “원측은 <<이부종륜론>>에 나오는 20부파의 학설을 크게 ‘부처님은 일음으로 설한다’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입장으로 양분하였다. 그 다음에 그 둘로 갈리게 된 철학적 배경을 <<대비바사론>>권79의 문답들을 인용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그렇지 않다’는 일음이 아니라 이음異音으로 설한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백진순은 원측의 “이 ‘일음’에 대한 사유에 이르면 오히려 바라문들의 언어철학적 사변을 떠올리게 한다”라고 하며 “‘일음’이라는 영원하고 불가사의한 언어적 실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백진순은 또한 “원측 소에 따르면 여러 대승경론에서는 한결같이 ‘여래의 일음’을 인정한다. 가령 ‘부처님은 일음으로 널리 많은 소리에 응할 수 있다’(<<무량의경>>),‘여래는 한마디 말을 설법하는 중에 무한한 경전을 연설한다’(<<대부사의경>>),‘부처님은 일음으로 법을 연설하나 유정들은 부류에 따라 각기 이해한다’(<<무구칭경>>),‘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고자 일체 중생의 언어와 음성을 이해하고서 범음성으로 설법하신다’(<<대지도론>>)는 등의 문구가 그것이다. 원측은 여러 대승 경론에 나오는 일음을 ‘梵音’으로 해석하였다. 이 범음은 부처의 삼십이상 중의 하나로서 마치 하늘 불이 울리듯 온 우주에 울려 퍼져 듣는 자들이 근기에 따라 이익을 얻게 한다는 부처님의 신비한 음성을 가리킨다.”라고 말하고 있다.
<<대지도론>>에 나온다는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고자 일체 중생의 언어와 음성을 이해하고서 범음성으로 설법하신다’는 부분이 보리유지의 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음성의 성을 살펴본다.
음성의 성聲 곧 말소리란 “무상한 물리적 소리로서 耳識에 의해 파악되고, 名·句·文은 그 소리 상에 나타나는 특정한 음운유형으로서 意識에 의해 파악된다.” “소리 상에 있는 특정한 음성적 유형에 의거해 名,句,文을 가립하는데, 최소의 음운 단위인 음소가 文이고 그 음소가 모여 하나의 단어(名)를 이루며, 둘 이상의 단어가 모여 문구(句)를 이룬다. 耳識이 소리의 自相을 파악하는 것이라면 名,句,文은 소리의 공통된 음운, 즉 共相이므로 의식에 의해 파악된다”고 한다.
聲, 名·句·文이라는 네 가지 法數에 국한시켜 법상학자들은 能詮의 범주를 말한다. 능전은 聲과 名·句·文이고 이는 곧 원측 소에서는 ‘體’이다. 聲을 교체로 보느냐 名·句·文을 교체로 보느냐 여부가 여러 주장이 나뉘는 계기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설일체유부는 전자(聲을 교체로 보는것)가 주류지만 초기에는 후자(名·句·文을 교체로 보는 것)를 강조하는 설도 있다고 한다.
경량부에서는 전자를 교체에 포함시켜보는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한다.
대승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원측이 미륵종(유식학파)의 교체론의 근거가 되는 경론의 문장들을 네 부류로 정리한 것에 근거함)
①부처님의 일음을 강조하면서 聲의 교체를 강조하는 경우(『유마경』이나 『무량의경』),
②名·句·文의 교체에 대해 말하는 경우(인왕경과 성유식론),
③聲과 名·句·文을 합해 교체로 보는 경우(인왕경과 십지론)
④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인 능전의 언어(文)와 그에 의해 드러나는 소전의 의미(義)를 합해서 교체로 보는 경우(유가사지론)
2)교상
그래서 중생이 마음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저마다 다른 교상을 나타낸다
所以於眾生的心解中,現起不一樣的教相
라고 번역된 부분에 교상教相이라는 말이 나온다. 구마라집의 견해를 설명하는 문장에서는 교상이 나오고 보리유지의 견해를 설명하는 문장에서는 교상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보리유지의 경우 그 교상을 교체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교상은 무엇일까? 이 대답을 위해서는 聲과 名·句·文을 중심으로 한 교체론이 아닌 本影(본질과 영상)을 중심으로 한 교체론에 따라 볼 때 잘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원측의 정의에 따르면 본질이란 ‘여래가 스스로 설한 것(如來自說)을 뜻하고, 영상이란 그 본질이 ’듣는 사람의 식에 전변되어 나타난 것(聞者識變)’을 말한다. ‘유식’의 교의를 받드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이 ‘교敎’를 설하고 누군가 그것을 들었다고 할 때 그 ‘교’란 설법자의 입에서 직접 발화된 음성(본질)을 뜻할 수도 있고 청자의 식에 현현된 언어적 표상(영상)을 뜻할 수도 있다.”
소승·대승의 다양한 견해를 원측은 사구로 정리하였는데 이와 같다고 한다.
①‘본질의 교체만 있고 영상의 교체는 없다’
②‘영상의 교체는 있고 본질의 교체는 없다’(‘교’가 흘러나온 궁극적 진여의 세계는 색깔·소리 등에 의해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교체는 영상의 차원에서만 말해질 수 있다)
③‘본질과 영상의 교체가 모두 있다’(三身說에 의거하면, 어떤 차원에서 부처님은 색깔·소리 등을 나타내므로 본질의 교체도 있고, 듣는 사람의 식이 그것과 유사한 언어적 표상을 변현해내므로 영상의 교체도 있다)
④‘본질도 영상도 없다’(승의제勝義諦의 차원에서는 본질이든 영상이든 모두 없기 때문이다)
원측은 위에서 두 가지(첫 번째와 세 번째의 것)로 대략 정리하는데 즉 여래가 직접 설하신 言音을 교체로 보는 것과 듣는 자의 識에 나타난 영상도 결국 여래의 ‘말의 힘’으로 인해 일어났으므로 또한 교체로 간주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위의 논의에 기초해 교상을 살피면 우선 本(본질)과 影(영상) 중에 교상은 影(청자의 식에 현현된 언어적 표상)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구마라집의 설에서는 影은 교체가 아닌 影 곧 교상이고 보리유지의 설에서는 그 영이 교체가 되는 까닭에 교상이 따로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청자의 식에 현현된 언어적 표상이 화자의 영역으로 들어가느냐 또는 청자의 영역으로 들어가느냐에 대한 차이로 보인다.구마라집의 설에서는 청자의 자율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보리유지의 설에서는 청자는 좀 더 수동적인 지위에 놓이게 된다. 물론 두 견해 모두 끝내 제대로 이해한다는 결론에 있어서는 같다. 하지만 교상이 화자의 지배에 놓이느냐 청자의 지배에 놓이느냐 하는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를 갖는다. 노랗거나 파랗거나 붉은 것이 이미 화자에게 있으니 보리유지의 설에서는 그저 색소를 수동적으로 발현시키는 청자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나 구마라집의 설에서는 근행과 번뇌의 차이에 따라 다른 교상 곧 影 곧 청자의 식에 현현된 언어적 표상을 발현시킨다. 일음에 일체 음성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물음은 교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과 같은 물음인 것이다.
대승기신론이 보리유지의 설을 따랐다는 것은 진여의 세계에 더 큰 힘을 실어줬다는 것을 뜻한다. 功德이나 起信과 같은 맥락에 서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3)여시아문
여시아문Evam mayā śrutam은 Thus have I heard로 번역된다.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나 로버트 설만Robert Thurman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칼루파하나는 이러한 형태의 번역에서 오는 철학적 문제점을 제기하고 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는 산스크리트와 팔리 불교경전에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수동형을 부다의 철학적 의도가 담긴 중요한 현상으로 간주하고 위의 문구를 ’thus has been heard by me’로 번역하고 있다. 즉 Evam은 thus로 mayā는 by me로 śrutam은 has been heard로 번역하여 부다의 의도를 영문 번역 안에서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칼루파하나는 의도적인 수동형 사용의 철학적 함의를 우파니사드 철학이 지닌 형이상학적 본체론의 거부로 해석하며, 수동형으로 표현된 mayā를 바로 본체론적인 자아개념을 회피하기 위한 장치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굳이 수동형으로 표현된 산스크리트 혹은 팔리 경전의 이 구절을 능동형으로 바꿀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며, 나아가 기존의 능동형 번역은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닌 서구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적극적 개입의 증거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위 인용에서 by me는 기이한 표현이기도 하다. has been heard와 결합할 때 어떤 단수형 주어(아마도 말씀 정도가 될 것이다. 아니면 그냥 It 정도일 수도 있다)가 나에 의해서 들린다라는 말은 우리 말로도 어색하다. 그러나 나에 의해서 들린다는 이 말은 서론에서 제기한 구마라집과 보리유지의 설이 갖는 차이와 연결되어 있다. 나에 의해서는 단순히 ‘나의 근기에 따라서’를 넘어 교상의 유무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本影有無와 관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mayā śrutam은 구마라집의 설에 따라 읽어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보리유지의 설에 따라 읽어야하는 것일까? 경전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이라면 후자의 설을 따를 것이고 일반 상식에 따라 일반문장으로 읽는 이라면 전자의 설을 따를 것이다.
3.결론
“언어에 대한 불교도들의 파격적인 논의는 '모든 언어는 일차적으로는 청각의 대상인 무상한 말소리(聲)'라고 보는 데서 시작된다. 또 하나의 말소리와 그에 의해 현현되는 의미(대상)간에는 본래 필연적 결합관계가 없고 '가짜로 시설된 것(假施設)이기 때문에 어떤 말의 의미는 특정 사회의 약정과 관습에 의해 결정되고 이해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전의 언어, 즉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말하자면 '진여'라든가 '오온' 등과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敎)일지라도 그것은 '말言'인 한에서 똑같이 '무상한 말소리'이고, 능전의 언어와 소전의 의미간의 관계에 대한 임시적 약정에 의거해서 작동되는 것이다.”
위 인용문은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圓音一演,異類等解’가 갖는 뜻과 상치된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종교적으로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으며 구마라집의 설이든 보리유지의 설이든 그 기초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논의가 깊어짐에 따라 자연히 발생하는 질문으로 볼 수도 있다. 화자와 청자 간의 일반적 대화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라면 피해갈 수 없는 질문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본론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보리유지의 설에서는 더 친절한 또는 더 능력 있는 화자를 가정하고 구마라집의 설에서는 더 자율적인 또는 더 능력 있는 청자를 가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무지개는 해의 것인지 허공의 것인지 아니면 비나 안개의 것인지 지구의 것인지 태양의 것인지 물어볼 만 할 것이다. 같은 담배일지라도 박하향 나는 필터는 박하냄새를 나게 한다. 필터가 교상인 것일까? 아니면 필터는 근기일까? 뭐 이런 질문들이 여럿 이어 나올 수 있다. 아무튼 나로서는 구마라집의 편에 서 있다. 담배에 필터가 달려있다 뭐 이런 뜻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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