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4일 수요일

연가칠년명延嘉7年銘 금동불상 명문 검토

延嘉7年銘 금동불상 再考(장 충식)를 기초로 서술함.

 
1.서문
 
불화 쪽을 발표해야겠다는 계획으로 <<한국불교미술사>>라는 책 불화부분을 읽다가 조각도 함께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에 앞부분을 같이 읽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불교 조각 부분 20쪽에서
 
“6세기 전반의 명문이 있는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중요한 상은 경상남도 의령에서 발견된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으로 광배 뒷면에 있는 명문에서 연가7년인 기미년에 고려국의 낙랑(수도 평양을 의미함)에 있던 동사라는 절에서 주지스님의 제자, 사도들이 천불을 조상造像하여 유포한 것 중 제29번째의 불인 회현의불回現義佛이라는 내용을 알 수 있다. 비록 역사 기록에는 연가라는 고구려 연호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유물과 명문에서 역사의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는 경우이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예전 역사 교과서에 그 이름만 알고 있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에 관해 호기심이 일어 인터넷에 찾아보니 이것(延嘉七年銘 金銅 佛 立像. 국보 119)에 관한 옛 문화재청 문화정보가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경상남도 의령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제작 연대를 지닌 금속(金屬) 금동제(金銅製)의 높이 16.2cm의 불상이다.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A.D 372) 불경(佛經). 불상과 함께 불교가 처음으로 국내에 전해 졌지만 연가 칠년이 새겨진 부처(延嘉七年銘 金銅 佛 立像. 국보 119)는 불상의 광배(光背) 뒷면에는 47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연가(延嘉) 연간의 일곱 번째 해인 기미(己未)년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있던 동사(東寺)라는 절에서 만들어 유포한 천불(千佛) 중 하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東寺主敬第子僧演師徒卌人共
연가칠년세재기미고려국낙랑동사주경제자승연사도사십인공
造賢劫千佛流布第卄九因現義佛比丘法穎所供養
조현겁천불유포제이십구인현의불비구법영소공양
 
연가7년인 기미년(539) 고려국(高麗國: 고구려)의 수도 낙양(樂良: 평양)에 있던
동사(東寺)의 주지스님 경()과 그 제자 승연(僧演)을 비롯한 사도 40인이 함께
현겁천불(賢劫千佛)을 조성하여 유포하기로 하였는데 (이 불상은) 29불인 인현의불(因現義佛)
비구 법영(法穎)이 공양합니다.
 
초기의 불상은 양식적으로 세장(細長)한 얼굴과 신체, 몸 좌우로 힘차게 퍼진 두터운 옷자락 등에서 중국의 북위(北魏)및 동.서위(.西魏) 양식의 영향이 농후 하지만, 중국 불상에 비해 단순화 되는 등 한국적인 조형미(造形美)도 함께 반영되어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
* 저널로그: http://blog.donga.com/yil2078/
이영일/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위의 정보를 바탕으로 장충식 저 <<한국불교미술 연구>>를 찾아보았습니다. 이 과정 중에 이번 발표를 연가7년명 금동불상으로 정했습니다. 명문에 관한 논쟁이 소개할 만 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하 본론부터는 위 장충식의 책 16쪽에서 37쪽에 해당하는 <연가7년명 금동불상 재고>에 있는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과 김리나 외 지음 <<한국 불교 미술사>>도 참고했습니다. 유홍준의 책은 2010년에 나왔으나 이 연가명불상의 명문에 관해서는 새로운 성과를 반영하지 않고 불상 해석에도 문제가 있어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김리나 또는 정은우가 맡은 위 책(2011)의 조각부분에서 회현의불이라고 인을 회로 읽었는데 정정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2. 연가7년명 금동불상의 발견경위와 출토지
 
1963716일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 산 40번지에서 이 동네 강갑순 씨(당시39) 모자가 발견한 이 불상은 광배에 음각된 조상명이나 양식에 있어서 고구려 불상으로 보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으나 그 출토지가 고구려의 고토가 아닌 고신라였던 점에서 발견 초기부터 학계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불상이 발견된 곳은 사원지가 아니며 어떠한 종교적 흔적도 없고 인위적으로 불상을 안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황수영의 <고구려 금동불상의 新例二座>(이상백박사회갑기념논문총,1964)에 따르면 지하 약 1자에서 자갈을 캐다가 사방 약 30cm 가량의 板石을 드니 그 밑에 같은 山石으로 된 폭 30cm, 40cm, 30cm 가량의 작은 석실 같은 것이 있었고 그 바닥에 불상이 仰臥安置되었을 뿐 다른 아무 시설도 없었다고 한다.
 
박경원의 <연가7년명 금동여래상의 출토지>(고고미술 제4748(1964),1-100호 합집)에 따르면 이 계곡 일대는 6.25사변 중 함안 전선에 침입한 공산군 대부대의 근거지로서 하촌리 일대는 공산군의 장기주둔지였으며 따라서 6.25 당시 어떤 경로를 통해 남하한 북한의 병사에 의해 이곳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곧 북한 병사 將來說이다. 장충식은 <<한국불교미술연구>>에서 이 설을 단순하고 안이한 견해라 하며 병사가 불상을 護持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고 또한 휴대에 따른 흔적 가령 도금의 마모 같은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부분적 마모가 없는 것은 아니나 호지에 의한 마모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북한병사 장래설과 같은 속단이 대두됨으로써 출토현장에 대한 정밀조사나 확대발굴과 같은 사후조치가 미흡해졌고 결국 불상 출토지 문제를 미궁에 빠뜨리고 말았고 또한 출토지 문제에 대한 논의를 중단시켰다고 말하였다.
 
3.양식
 
고구려의 불상 양식이 중국 북조의 불상 조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이 연가7년명 불상은 북위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나 이미 고구려적 분위기도 반영하고 있다.
 
머리 부분에는 담청의 채색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육계肉髻가 높고 나발螺髮이 뚜렷하게 표현되었으나 큰 귀에 비해 눈과 코, 입 등은 작게 나타냈으며, 여원시무외與願施無畏의 삼국시대 공통의 수인을 취했다. 손과 얼굴이 신체에 비해 유난히 커서 비례가 맞지 않으며, 通肩大衣는 단조로우면서도 예리하다.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도록 反掌한 오른손은 모두 완전히 펴고 있는 데에 비해 왼손은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구부렸으며, 두 팔을 타고 내려온 법의는 좌우에서 3단으로 날카롭게 처리되었고, 복부에서도 여러 단의 날카로운 옷주름을 형성했다. 광배는 심한 굴곡을 보이는데 윗부분은 (발굴 후 잘못으로) 부러져 수리했으나 원상에는 별다른 손상이 없다. 소용돌이치는 불꽃문양은 마치 여러 가닥의 指印文을 연결시켜 놓은 듯한데 선각으로 처리된 이러한 양식은 이 시기에 유행된 고식으로 생각된다. 불상의 대좌는 원통형으로서 상대와 하대는 모두 素文인데 상대를 받치는 있는 伏蓮의 단조로운 6엽 연꽃은 터질 듯이 도톰한 볼륨을 지니고 있으며 저부는 원통형이다. 연화문은 5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는 長天 1호분의 얇고 날카로운 연화문이나 6세기 후반으로 알려진 강서대묘에 나타나는 도톰한 연화문 등과 비슷하다.
불상의 조각 기법을 살펴보면, 좌우대칭의 衣文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넓게 퍼져 두터우며, 두 어깨를 타고 내려오는 통견의 대의 역시 단조로우면서도 조각 자체에 자신감을 지닌 능숙한 장인의 솜씨가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정도의 조각 기술이 정착하기까지는 불교가 전래된 후부터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불상은 전체 높이가 16.3 세티미터이며 불신과 광배 그리고 광배까지 하나로 주조했으나 불행히도 광배는 출토 후 잘못 취급해 상부가 절단되었다. 이로 인해 광배 뒷면에 4행으로 음각된 명문의 매 행 2, 3자 사이에 틈이 생겼으나 현상의 파악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불상의 양식뿐 아니라 광배의 조상명은 삼국시대 조각사 이해에 중요한 단서가 되므로 이 불상은 발견 후 곧 국보 제 119호로 지정되었다.
 
 
4.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명문
 
우선 유홍준이 책 303쪽에 실은 447자의 명문 번역과 그 끊어 읽은 것을 발표자가 아래에 옮긴다 .
 
연가7년 기미년에 고()려 낙랑 동사의 주지 경은 제자 연을 비롯한 40인과 함께 과거 현재 미래(현겁)의 일천 부을 만들어 널리 퍼뜨리고자 하였다. 이것이 스물아홉 번째 인현부처님이다. 비구 도영이 공양하는 바이다.
延嘉七年 歲在己未 高麗國 樂良 東寺 主敬 弟子僧演 師徒卌人 共造 賢劫千佛 流布第卄九 因現歲佛 比丘擣穎 所供養
연가칠년 세재기미 고려국 낙랑 동사 주경 제자승연 사도사십인 공조 현겁천불 유포제이십구 인현세불 비구도영 소공양
 
金元龍
 
延嘉七年己未年에 고구려국낙랑(평양)동사의 住持 경과 弟子 僧 演을 비롯한 사제 40인이 힘을 합해 現劫(現時)에 나타나는 천불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하기로 하였으며 이 입불은 그 제29번째로서 比丘 擣熲(또는 法類)이 공양하는 바이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
東寺主敬弟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劫千佛流布第卄九回現歲
佛比丘擣熲所供養
 
*찢을 도 빛날 경 강이름 영
 
김영태
 
연가칠년 기미해에 고려국(고구려를 가리킴)의 낙랑 동사 (주지)(부처님을) 공경하는 제자 승연의 스승 제자(師徒) 40명이 함께 현겁천불을 조성해 유포하기로 했다. 그 스물아홉째의 부처님인 () 因現義佛은 비구**이 공양한 것이다
 
문명대
 
연희7년인 기미년 즉, 539년에 고구려국 낙랑 동사의 主持(住持의 오인인듯)인 경과 제자 승 연을 비롯한 사도 40인이 현겁천불을 만들어 유포했는데, 29번째인 因現義佛 또는 現歲佛은 비구 ()()가 공양한 것이다
 
*들어올릴 대
 
장충식
 
연가7년 기미해에 고구려 낙랑 동사의 주관자인 공경하는 佛弟子 승연스님의 무리(사도) 40인이 함께 현겁 천불을 조성해 유포하기로 하였는데 그 스물아홉 번째의 인현의불因現義佛은 비구 법류가 공양한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
東寺主敬苐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劫千佛流布第卄九囙現義
佛比丘法類所供養
 
 
 
5. 명문의 구체적 검토
 
(1)延嘉七年 歲在己未 高麗國
 
이 명문이 있기에 이 불상이 고구려 것임을 확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충식은 "만약 연가7년명 불상에 명문이 없었더라도 고구려 불상으로 볼 수 있었을까" 라고 묻고 '이동이 가능한 조형물의 경우 국적문제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이 불상이 주었다고 말하였다.
고려국 즉 고구려국과는 달리 연가칠년 기미년이 몇 년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왔다.
 
김원용 윤무병은 각각 1964년 고고미술 59호와 10호에서 안원왕 9년 기미년(539)으로 추정하여 그간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최근에는 손영종의 견해에 준해 좀더 연대를 올려보려는 곧 장수왕 67년 기미년(479)으로 추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문명대는 479년설을 제시하였다. 김영태는 장수왕 7년 기미년(419)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수영 권상로는 599년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결국 안원왕 때라는 정설과 장수왕 때라는 새로운 주장이 있다고 하겠다. 김영태는 장수왕 7년인 기미년을 주장하였고 손영종은 415년 제작된 광개토왕 호우의 명문에 연가 연호가 보이지 않고 419년은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진지 50년도 안된 시기인데 이러한 불상을 만들 수 있을까 의문을 표시하며 419년은 너무 이르게 잡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장수왕 67(479)을 주장했는데 그 근거는 장수왕 즉위 주갑周甲이 되는 473년에 改元해서 장수왕67(479)이 곧 연가7년이 된다는 것이다.
 
장충식은 중국불상 가령 태화6년명 청동불입상(482)과 천평3년명 금동미륵불입상(536)을 들어 기존 정설을 지지한다. 479년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드는 것이 예로든 전자의 불상에 보이는 광배의 화염문 등이 연가7년명불상에 비해 선행한 양식으로 보인다는 것이고 또 중국의 불상양식이 한반도에 전래되려면 최소 15년은 걸릴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예로 든 후자의 중국불상을 모범으로 삼아 그것을 제작했다고 보아 479년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고 539년 설이 유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장충식도 언급했듯이 중국불상조각에서 두광과 신광이 표현된 5,6세기 불상이 더 진전된 발전 양식이라면 두광이나 신광 대신 광배에 연가7년명 불상에 화염문이 나타난 것은 천평3년의 금동불상을 모범으로 하여 제작했을 것이라는 가정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충식은 화염문이 나타나는 태화6년명 청동불입상의 경우에는 같은 화염문이라도 연가7년명 불상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보고 또 전래기간을 가정하는데 발표자의 생각에는 확연해보이지 않는다.
 
(2) 樂良 東寺 主敬 弟子僧演
 
낙랑은 곧 평양이라고 김원룡은 번역에 괄호를 쳐 밝혔지만 다른 학자의 경우 평양으로 짐작된다거나 그 정확한 위치는 확정할 수 없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東寺 主에 대해 장충식은 住持로 새기는 것에 대해 삼국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주지라는 직제가 활용되었다고 보기보다는 글자의 주어진 현상대로 풀이해 주관자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敬弟子僧演에 대해서도 주지 경과 그 제자 승려 연으로 푸는 것에 대해 잘못이라고 하고 있다. 마땅히 경불제자 승연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권3에 나오는 護法敬僧이나 사경에 나오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또한 승려 연은 잘못이고 승연이라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고구려의 승랑僧朗이나 신라의 승실僧實 고려의 승린僧麟이나 중국의 僧肇, 僧那 등을 그 예로 들고 있다. 대정 신수 대장경을 검색하면 승 자가 붙으면서 외자 아닌 승명은 한국과 중국을 막론하고 수백 개가 확인된다고 한다.
 
(3) 師徒卌人 共造 賢劫千佛 流布第卄九 因現歲佛
 
사도 사십인을 이전 해석에서는 스승 경과 제자 39인으로 해석하였다. 승연과 그의 문도 40인이 현겁의 천불을 조성해 세상에 유포하기로 한 것으로 봐야한다. 인현세불은 인현의불로 읽어야 한다. 이 내용은 종래까지 '제이십구인현의불''제이시구회현세불'로 판독했으나 <<현겁경>>의 내용을 따르는 제29인현의불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자는 앞의 '세재'에 기록된 ''의 자형과는 완전히 다르고 또 '현세'라는 말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比丘擣頴 所供養
 
이 인현의불의 공양자는 비구법류인데 이 '법류'는 도경(또는 법류)으로 읽기도 했으나 이를 자세히 분석하면 '법류'라 읽을 수 있다.
 
김원룡은 <<고고미술>> 50(1964)에서 대경擡熲이라 했다가 <<한국미술사>>(범문사,1968)에서는 도경擣熲이라고 했다.
 
中吉功<신라 고려의 불상>이라는 글에서 法類라 했고 久野健<고대조선불과 飛鳥佛>(동출판, 1979)에서 도영擣潁(법류)이라고 했다.
 
*찧을 도, 들 대, 이삭 영, 이삭 영, 강이름 영, 빛날 경
 
 
6. 맺으며
 
2010(유홍준)2011(김리나 외)에 한국미술사라는 이름을 걸고 나온 두 책에서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명문 해석은 각각 다릅니다. 독자들로서는 혼란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위와 같이 한번 명문에 따라 정리해 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조론을 지은 승조라는 이름이 있는 것처럼 승연이라고 하나의 이름으로 읽어야 한다고 봅니다. 또 현겁경이 있는 이상 인현의불이라고 당연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로 여러 불상을 보면서 자세히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부처님이 깨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그것들 특히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박물관에 있다는 <천평3년명 금동미륵불입상>(536, 높이 61cm)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중국의 불상들이 미국 일본 박물관등에 있는 것들을 보며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부가.

김리나의 책 16 쪽에 다음과 같은 문장은 숭유억불의 조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여 위 글관 관계없지만 소개한다.

조선시대는 흔히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고려의 불교 숭상이 가져온 폐단을 인식하여 새로운 왕조가 내세운 정치적인 이념이었으며 태조 이성계 자신의 불교 숭상이나 태종 및 세종의 불교 미술 후원은 계속되었다. 특히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활발한 불사 활동이나 왕실 비빈들의 불교 후원과 불교로의 귀의는 인간 사후에 대한 구원이나 세속적인 기복신앙에 대한 오랜 전통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또한 16세기 말에 일어난 일본의 침략으로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17세기부터는 조선시대 불교 미술이 새로운 활력소를 얻었다. 활발한 불사와 불상 제작은 지금까지 전해져 남아 있는 대부분의 조선시대 사찰과 그 속에 봉안된 불상, 불화의 존재로도 증명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는 중국 및 일본의 불교 조각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독특하면서도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감성을 보여주는 불교 조각 양식이 성립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한국 문화의 전통으로 불교문화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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