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30일 화요일

반야심경 불생불명 불구부정 부증불감에 대한 춘성 스님의 해석

-반야심경에 불생불멸,불구부정,부증불감이라는 말은 사람의 마음과 똑같은 것이야
-봐라!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때가 묻지도 않고, 꺠긋하지도 않으며, 불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것이지.
-거울에 꽃이 비추면 그 거울 속에 꽃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울 속에는 꽃이 없어.
-그러니 꽃이 생긴 것이 아니며, 거울에 비춘 꽃이 없어 졌다고 해서 꽃이 사라진 것도 아니란 말이야.
-거울 속에는 생긴 것도 없고, 사라진 것도 없는 것과 같이 마음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돼
-그와 같이 사람의 마음에 며느리를 미워하고, 시어머니를 미워하는 생각이 비추었다, 사라졌다 할 뿐이지.
-그러니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
-그러나 미워해야 할 일은 잊어버리면 그만이지.
-거울에 똥이 비쳤다고 해서 거울이 더러워지면, 아름다운 꽃이 비쳤다고 해서 거울이 깨끗해지겠어? 거울은 더러워지지도, 깨끗해지지도 않아.
-그것이 불구부정이다는 것을 알아야 돼.
-거울에 무거운 것이 비쳤다고 해서 거울이 무거워지고, 무거운 것을 비추지 않는다고 해서 거울이 가벼워지지도 않아.
-이것이 부증불감이야.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아서 미워할 일을 비추지 않으면 미워하지않게 되는 게야.


<<춘성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 김광식 지음,새싹 펴냄,406-7ㅉ

2013년 7월 28일 일요일

한용운 행장-춘성

한용운의 비석을 탑골공원에 세울 그 무렵(1970년 3월1일)에 경봉은 사람을 보내 한용운의 행장을 정리하여 보내 달라고 춘성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답한 춘성의 의미심장한 편지가 있다.  


애국자의 역사와 비석은 나라를 위하고 우리들을 위하여 서대문 감옥에서 삼년간을 계실 때에 귀가 얼어 빠지고, 발가락이 얼어 빠진 것, 이것이 한용운 선생의 비석이요, 역사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삼월 일일을 당하여 독립기념식을  행할 때에 한용운과 백용성 그 두 분의 이름을 낭독할 때에 그 두 분 참석한 것이 불교의 광명이요, 불교의 서광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천지에 찬 비석이요, 천지를 울리는 땡땡 소리가 나는 비석이요, 역사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비석을 하시고 역사를 모집한다는 것이 한용운 선생을 위해서 좋은 예찬이오나 한로축괴韓盧逐塊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하오나 선생을 위해서 기금을 그와 같이 모집하셨다고 하오니 너무나 감축하고 감사하옵니다.
 춘성은 소위 제자라고 하면서 부끄러운 땀을 어찌 하오리까.성의껏 하십시오.
 한용운 선생 열반 때에 신체는 화장을 모시옵고, 그때의 유골을 박광朴洸이라고 하는 사람이 무덤에 모신다고 하고서 모시고 망우리 고개로 모시고 가서 거기서 성분을 하고 모셨답니다.
 안승철 선생이 금년 봄에 한용운 선생의 역사를 묻기에 답서를 아니하고 덮어둔 것이 이것입니다.
 경봉당! 자네 들어보게. 경봉당이 물으니 내 되잖은 지견으로 사실을 적어 보냈으니 그리 아소
 12월 10일
망월사 이춘성




만구성비萬口成碑라는 선가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백담사 회주인 조오현은 춘성이 한용운을 표현한 이 대목을 가장 즐겨 인용했다."만인의 입에서 자주 떠올리게 되는 그것이 곧 비석이며, 역사라는 것이다."



김광식 지음,춘성 무애도인 삶의 이야기,새싹 펴냄,147-8-9 ㅉ

2013년 7월 18일 목요일

현량과 비량

신상환의 <<용수의 사유>>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 325ㅉ에 현량과 비량이 나오기에 정리삼아(몇 달 전 현량과 비량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논문 초록을 영문으로 번역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영문 표기를 찾느라 검색하던 기억이 있어) 옮기던 중 

이분별 무착란지심식離分別 無錯亂之心識 즉 '분별을 떠나 오류가 없는 심식'을 일러 불교 논리학에서는 현량pratyaksa,direct perceiver이라고 한다.이와 대조되는 것으로 비량anumana,inferential cognizer이라는 것이 있다.


비량에는 세가지가 있다.신허비량信許比量과 극성비량極成比量과 직접비량 또는 사세비량事勢比量이 그것이다.

영어로는 각각 inference through belief,inference through renown,inference by the power of the fact이다.

그러니까 위 까지 옮기던 중 인터넷 사이트http://patiensky.blog.me/120125073367에 같은 내용이 있어 수고를 덜었다.담정의 샨띠통신이라는 네이버 블로그인데 아마도 그 본명이 신상환이라는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극성비량의 극이라는 한자가 책에서는 연극 할 때의 극으로 나오고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궁극 할 때의 극으로 나오는데 후자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이렇게 말할 게 아니라 한번 더 검색해 위키 등에서 알아보고 오겠다.휙~

구글에서 바로 검색된다.후자가 맞다.중국어 사이트가 이런 쪽으로는 신뢰도가 높고 양도 많다.
그런데 비량을 4종으로 나눈 것도 있어 눈길에 띈다.신허,극성,사세 외에 도유비량이 있다는 것이다.(http://www.lama.com.tw/content/edu/data.aspx?id=2133)






比量分四:事勢比量、極成比量、度喻比量、信許比量。

比量分四種:

1.事勢比量——凡以清淨正理安立的正確認知。如:桌子有法(法),是自性無(宗),以緣起故(因)。即以緣起正理之因相(諸法緣起有),成立桌子自性無的立宗。
2.極成比量——亦稱世許比量,如世人一聽到嫦娥宮殿時,即知是指月亮之義。
3.度喻比量——指以譬喻方式的推理而了知,如在繩上假名為蛇,表示繩之蛇,是依分別心在繩上假立為蛇而已,是假名安立而存在的法,則知其餘諸法亦皆如是安立而存在。

4.信許比量——指由聞思佛經論典法義後,而生定解的認知,如信許佈施得受用果報。佛因大悲心,是不妄語者,故所教說為聖言量。


도유비랑을 다시 검색하고 오겠다.휘릭이익~




【三量】1.现量、比量、圣教量。现量是在根境绝对时,用不着认识思考就可以直觉亲证到的,如眼耳鼻舌身前五识去了别色声香味触五尘的时分是;比量是比度而知,如远见烟就晓得彼处有火,听到隔壁有说话的声响,就晓得外面有人是;圣教量又名圣言量,是由于有圣人的文教才晓得的意 [佛学罕见辞汇 - 陈义孝编]

  (二)成唯识论卷二所立之三量。即:(一)所量,指被测度量知之对象。(二)能量,指可以用以量知者。(三)量果,指所量知之结果。例如欲量知一织物,则织物为所量,标准为能量,所量得之尺寸为量果。成唯识论复基于此说,将心识之作用分为四分,而以相分为所量,见分为能量,自证分为量果。(参阅‘四分’1663)

  【四分三量】量是熟悉作用,量果是熟悉作用的结果。识体四分,亦有量证的作用。例如以尺量布为喻。以尺量布,尺是能量,布是所量,量后所知的尺寸,就是量果。以斗量米,斗是能量,米是所量,量出的斗数是量果。而四分之间,亦有相互量证的作用。四分的量证有下列四种情形:一、相分为所量,见分为能量,自证分为量果。二、见分为所量,自定证分为能量,证自证分为量果。三、自证分为所量,证自证分为能量,自证分为量果。四、证自证分为所量,自证分为能量,证自证分为量果。由上四种情形,可得如下结论:一、相分只可做‘所量’,不能做‘能量’及量果’。二、见分可做‘能量’,不能做‘量果’。且其能量有时错误,成为‘非量’。三、自证分和证自证分可做‘能量’及‘量果’,因其都是外表的‘现量’。四、自证分和证自证分可以互为‘能量’,亦可以互为量果。 

소기의 성과를 얻지못하고 다른 고기만 낚고서는 급히 돌아왔다.

아무튼 극성비량의 극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책 저자 사이트에 있는 것을 무단전재 게시하는 바이다.




여기서 칸트의 유명한 선험성(先驗性, the prior)을 불교 논리학적 측면에서 살펴보자. 경험주의에 반대하는 칸트가 취한 선험성이란,

‘‘대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선험적으로 가능한 대상 인식의 방법에 관한 인식’ 또는 ‘어떤 직관 혹은 개념이 선험적으로만 가능한 것 또는 그 가능한 근거의 인식 수단인 선천적 인식’이라 하여 ‘초절적(超絶的)’과도 구별되었다. 즉 ‘선천적 인식 대상의 가능성의 인식(필자 강조)’이 곧 ‘선험적’의 뜻이다.’

칸트의 이 선험성은 ‘분별을 떠나 오류가 없는 심식(離分別 無錯亂之心識)’이란 정의를 가진 불교 논리학의 현량(現量, pratyakṣa, direct perceiver)과 유사한 개념이다. 서구철학에서 추론을 통해 성립되는 논리적 사유와 불교 논리학의 비량(比量,anumāna, Inferential cognizer)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선험성과 현량은 이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불교 논리학답게, 비량에는 약간 다른 점이 눈에 띈다. 비량을 세분화하면 3가지로 나누어진다.


Chi.,
Skt.,
Tib.,
Eng.,
1
신허비량
信許比量
*āpta anumāna
yid ches rjes dpag
inference through belief
2
극성비량
極成比量
*prasiddha anumāna
grags pa’i rjes dpag
inference through renown
3
직접비량
直接比量/
사세비량
事勢比量
*vastu-bala-anumāna
dngos stobs rjes dpag
inference by the power of the fact

불교 논리학의 특징은 종교적 신념(신허비량)과 많은 사람들이 믿어 잘 알려진 것(극성비량)도 개념적 인식인 비량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불교 논리학의 맨 처음 시작 지점인 현량(개념적이지 않은 직관에 의해 획득된 무오류의 인식)에는 붓다와 보살을 향한 종교적 신념과 세간의 보편적 인식이 끼어들 수 없기 때문에, 즉 종교적 신념과 다수의 믿음이라는 것은 직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또는 이성적인 작용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개념적 인식인 비량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신허비량과 극성비량을 포함하는 불교 논리학의 비량에 서구의 논리학은 그다지 관용적이지 않으며, 다만 세 번째인 직접 비량, 즉 이성적ㆍ합리적 추론을 통해 획득되어지는 것만을 논리적 사유로 간주하고 있다. 이 직접 비량은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성적 인식의 수단으로 칸트의 선험성에 정확한 반대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선험성과 불교 논리학의 현량을 살펴보아도 차이가 드러난다. 왜냐하면 현량에는 불교적 수행을 강조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요가를 통해 획득되어지는 ‘유가 현량(瑜伽現量, yogi pratyakṣa, Tib., rnal ’byor mngon sum)’으로, 이것은 ‘성문ㆍ독각 그리고 보살의 수행을 통해 획득된다’고 정의되어 있다. 그러므로 칸트의 선험성은 전체 현량이 아닌 현량의 일부분밖에 될 수 없다. 일단, 3종량(三種量) 가운데 4종 현량을 살펴보자.


Chi.,
Skt.,
Tib.,
Eng.,
1
근현량
根現量
Indriya pratyakṣa
dbang mngon sum
sense direct perceiver
2
의현량
意現量
Mānasa pratyakṣa
yid mngon sum
mental direct perceiver
3
자증분현량
自證分現量
Svasamvedana
pratyakṣa
rang rig mngon sum
self-knowing direct
perceiver
4
유가현량
瑜伽現量
Yogi pratyakṣa
rnal ’byor mngon sum
yogic direct perceiver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등, 5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 획득되는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 등 5종 근현량과 그리고 법(法)에서 획득되어지는 의현량(意現量) 등 직관적 인식 가운데, 칸트의 선험성은 세 번째인 자증분현량과 유사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종교적 수행을 ‘포함하기 위해서’ 논리학적 개념을 정의하는 불교와 달리 종교적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서’ 발전한 독일 관념론과는 기본적으로 그 차이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직관적(perceptive) 그리고 개념적(conceptive)이라는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인식의 출발점부터 다른 이 불교 논리학과 독일 관념론의 차이성은 철학이 보편성을 띠고 있다지만 이것에 대한 비교 연구의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불교철학에 어떤 서구철학의 ‘~주의’를 붙이면, 우리가 제아무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이와 같은 각기 다른 출발점으로 인해서, 그 근본적인 차이를 놓칠 수밖에 없게 된다.

2011년 2월 25일 초판 1쇄 발행된 신상환, 용수의 사유 327ㅉ 주 37.에는 '티벳불교 논리학에서 현량의 정의는 종파들마다 약간 다르다.여기서는 주요 종파인 게룩빠에 따랐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신상환







아래는 언제 시간 나면 보겠지 하고 구글에서 검색하다 찾은 글.


龍樹《迴諍論》中「量」之理論的研究


楊惠南
台大哲學系副教授



p. 111

提要

龍樹的《迴諍論》,被視為是對印度婆羅門教六派哲學之正理學派的批評。正理學派主張獲得正確知識的方法有四種——「四量」,其中之一是邏輯的推理——「比量」。《迴諍論》站在「一切皆空」的立場,否定了「比量」及其他三量的真實可靠性。而其主要的理由共有三個。本文的第一個目的,即對龍樹的這三個理由做一分析研究。
本文的另外一個目的是在說明:龍樹雖然否定了正理學派的「比量」,但他自己卻也大量採用了「比量」;例如相當於歸謬證法的「應成法」等。這一矛盾如何解釋?本文作者指出:在第一義諦之中,一切皆空,因此正理學派的「比量」固然是空幻不實的,龍樹自已所採用的「比量」也自然是空幻不實的。但是,在世俗諦之中,卻不妨允許「比量」的採用。因此,龍樹一方面批判正理學派的「比量」,二方面卻又自己大量採用了「比量」;這二者似乎是矛盾的,但在二諦的理論之下卻解消了矛盾而統一了起來。

一、引論

《迴諍論》(Vigrahavyāvartanī)是印度中觀學派(Mādhyamika)學者——龍樹(NāgārjunaA.D. 150-250)的主要著作之一。由於論中用了許多篇幅,批判了四種獲得正確知識的方法——量(pramāṇa)[1],因此,學界咸認這是一部針對印度正理學派(Nyāya)而發的作品;因為,四種「量」正是這一學派的主張。
依據正理學派的主要代表之一 —— 瞿曇(GautamaA.D. 50~150)

p. 112

所著的《正理經》(Nyāya-sūtra)中,所列舉的四種 「量」是[2]:(1)現量(pratyakṣa),即感官知覺;(2)比量(anumāna),即邏輯上的推論;(3)譬喻量(upamāna),即比較[3];(4)阿含量(āgama或'sabda),即權威人士所說的話[4]。《正理經》的作者以為,透過這四種「量」,使我人從外在的世界,獲得了正確的知識。另一方面,龍樹的《迴諍論》中也提到了這四種 「量」,並且作了詳細的批判[5];因此,無疑地,《迴諍論》中有關四種「量」的理論,乃是針對正理學派而提出的[6]。
龍樹的《迴諍論》,站在 「一切法皆悉空」[7]的立場,否定了四種「量」的真實存在性;其中自然包括邏輯推論上的「比量」。但是,我們發現,《迴諍論》中用了大量的邏輯推論,而在龍樹其他的作品裡,例如《中論》(Madhyamaka-kārikā),也用了大量的邏輯推論[8。這樣看來,龍樹一方面否定了邏輯推論的真實可靠性,二方面卻又不斷地應用邏輯推論;這兩者之間似乎存在著不可解消的矛盾。
本文希望透過《迴諍論》中有關四種「量」的理論之探究,試圖解消上述所說的矛盾。

二、《迴諍論》對於「量」的批判

(一)第一批判

為了消解上述所說的矛盾,我們有必要先來看看《迴諍論》中如何批判正理學派的四量說。
首先,正理學派針對龍樹 「一切諸法空」śūnyāḥ sarvabhāvāḥ)[9]的主張,提出了他們的反駁:
若彼現是有,汝何(可? [10]得有迴,彼現亦是無,云何得取迴?說現、比、阿含,譬喻等四量,現、比、阿含成,譬喻亦能成[11]。

這是難懂的兩首偈頌。依照巴達恰亞(KBhattacharya)的英譯本《迴諍論》[12],前四句應該是下面的意思:

p. 113


如果你經由現量(pratyakṣa)而認識事物之後,才否定了事物的存在,那麼,用來認知事物的現量也同樣不存在(tan nāsti pratykṣaṃ bhāvā yenopalabhyante[13]。

正理學派的意思是:如果像龍樹那樣,主張一切皆空,而否定了所有事物的存在性,那麼,現量(感官知覺)也必定在否定之列。如此一來,我人即無法透過現量,認識外界事物。(因為現量也是不存在的。)而一個未被認知的事物,要否定它的存在性,是不可能的。所以《迴諍論》的註釋說:
如此,經由現量這種認知方法而認識事物是不可能的。(tasmāt pratyakṣeṇa pramāṇena mopalambhahhāvaḥ)而且,否定一個未被認知的事物,也是邏輯上的不可能。(anupalabdhasya ca pratiṣedhānupapattiḥ)在這種情形下,你說一切事物皆空,這並不正確[14]。
前引《迴諍論》文的後四句,依據巴達恰亞的英譯本,應該是下面的意思:
在我們對於現量的駁斥中,我們已經駁斥了經由比量、阿含量和譬喻量;同時,我們也駁斥了經由比量、阿含量和譬喻量而被認知的事物。(anumānāgamasādhyā yerthā dṛṣṭāntasadhyāś ca.)[15]
顯然,這是前一頌的推廣。前一頌只說到了現量,這一頌則更普遍地推廣到其他三量。也就是說,正理學派認為,如果像龍樹那樣主張一切皆空,那麼,不但現量不存在,其他的比量、阿含量和譬喻量也不存在。這四量乃是認識外在事物的工具,沒有四量,認識事物也成了不可能的一件事情。而認識事物既然不可能,想把事物否定掉自然也就不可能;因為,依照正理學派的哲學看來,我們不可能否定一個不存在的東西。所以《迴諍論》的註釋說:
比、(譬)喻、阿含、現等四量,若現能成,比、阿含等皆亦能成。如一切法皆悉是空,現量亦空,如是比、(譬)喻亦空。彼量所成一切諸法皆悉是空:以四種量在一切故,隨何等法?……若如是者,法不可得,量所量無,是故無遮。如是若說一切法空無自體者,

p. 114
義不相應[16]。

從以上兩首《迴諍論》的偈頌及其註釋看來,正理學派對於龍樹一切皆空的反駁,有三點特別值得注意:
(一)外在的事物是真實存在而不空的;
(二)認識外在事物的工具——四種量是真實存在而不空的;
(三)未被認知的事物是不可能被否定的。
三點中的(1)與(2)是正理學派站在實在論(Realism)的立場上,所必然的主張。而第(3)點是值得深論的。依照正理學派澈底實在論的立場來看,不但第(1)點所說的外在事物——「所取」(grāhya)和第(2)點所說的四種認知工具(四量)——亦即「能取」(grāha)是真實存在的,而且,認知作用——「取」(tadgrahitṛ)也是真實存在的。其次,不但認知作用(取)是真實存在的,而且,當我人否定某物之存在時,能否定的語言[17——「能遮」(pratiṣedhṛ)、被否定的事物——「所遮」(pratiṣedha)等三者,也都是真實存在的。所以,《迴諍論》說:
取、所取、能取,遮、所遮、能遮,如是六種義,皆悉是有法[18]。

遮、所遮、以及能遮等三者的真實存在,龍樹的弟子——提婆(Āryadeva),曾經在他的《百論》卷下當中,舉了一個實例;相信這個實例是正理學派所提出來的[19]:
外曰:汝無成是成;如言室空無馬,則有無馬。如是,汝雖言諸法空無相,而能生種種心故,應有無。是則,無成是成[20]。

引文中的「無成」即是中觀學派「諸法空無相」的主張,亦是《迴諍論》中所說的「遮」、「所遮」和「能遮」。文中一開頭的「外」,即正理學派等實在論的「外道」;他們一致主張「無成」本身也是一種「成」(真實存在性)。這就像當一個人用「室空無馬」這一語句,來否定馬的存在時,不但這種否定作用(遮)存在,而且能否定的這句話本身(能遮),以及被否定的馬(所遮)都是存在的。所以,引文說「有無馬」(「無馬」是存在的),「有無」(「無」是存在的)。
「無」或「無馬」是一種存在,是正理學派和印度其他許多教派的共同主張[21],

p. 115

也是了解龍樹和正理學派間之所以互有爭論產生的關鍵。龍樹站在一切皆空的立場,自然不會同意這種主張。因此,龍樹用他慣用的歸謬證法(reductio ad absurdum),亦即「應成法」(prāsangika-anumāna)[22],證明正理學派的主張有實存的「遮」乃至「能遮」是自相矛盾的說法:
若有體得遮,若空得言成;若無體無空,云何得遮成?汝為何所遮?汝所遮則空;法空而有遮,如是汝諍失。我無有少物,是故我不遮;如是汝無理,枉橫而難我[23]。

依據巴達恰亞的英譯本《迴諍論》,這三首晦澀的偈頌,意思是:
如果否定(遮)確是存有,那麼,空性即被證明了(śūnyatvaṃ nanu prasiddham idam)。因為,你們否定了事物的自性是空的(pratiṣedhyate hi bhavān bhāvānāṃ niḥsvabhāvatvam)。(以上是第一首偈頌。)如果你否定了空性,而且空性是不存在的(pratiṣedhayase 'tha tvaṃ śūnyatvaṃ tac ca nāsti śūnyatvam),那麼,你那有關否定(遮)是存有的立場,就喪失了(pratiṣedhaḥ sata iti te nanu eṣa vihiyate vādaḥ)。(以上是第二首偈頌。)我並不否定(遮)任何事物,也沒有任何事物被否定(pratiṣedhayāmi nāhaṃ kiṃcit pratiṣedhyam asti na ca kiṃcit)。因此,當你說「你有所否定」時,你毀謗了我[24]。

引文中,龍樹首先在第一首偈頌當中,採用了歸謬證法(應成法),證明否定(遮)的不真實性。他說:如果真有否定(遮)的存在,那麼我主張的「一切皆空」就被證明了;因為,你否定了「一切皆空」的成立。前文說過,依照正理學派的說法,被否定的事物——所遮,必須是存在而成立的。現在,「一切皆空」既然被正理學派所否定了,那麼,「一切皆空」即已被證明成立了。
其次,龍樹又在第二首偈頌當中,採用同樣的歸謬證法(應成法),證明「空性」(śūnyatva)的真實性。他說:假設你所否定的「空性」不成立,那麼,你的主張——「所遮是真實的存有」即不成立;因為「空性」是你的「所遮」。


p. 116

龍樹在第一、二首偈頌當中,一方面證明了否定(遮)的不真實性,二方面又證明了「空性」(一切皆空)的真實性之後,緊接著在第三首偈頌當中,下結論說:我不否定任何事物,也沒有任何事物被我否定。也就是說,「一切皆z」或「空性」這一語詞,只在「告訴我人」(jñāpayati)[25世界的真象是空;這一語詞的作用並不在否定任何事物的真實性。
總之,正理學派站在澈底實在論的立場,主張:(1)外在事物真實不空;(2)認識外在事物的四種工具(四量)真實不空;(3)未被認知的事物不可能被否定(亦即,被否定的——「所遮」必須是真實不空的)。(詳前文。)另一方面,龍樹卻站在「一切皆空」的立場,否定了外在事物與四量,以及「所遮」乃至「能遮」、「遮」的真實性。所以,他說:
若我取轉迴,則須用現等;取轉迴有過,不爾云何過?此偈明何義?我若如是少有法物,則須現、比、阿含、譬喻如是四量,復有四量。我若如是取轉迴者,我則有過。我既不取少法轉迴,若我如是不轉不迴,汝若如是與我過者,是義然[26]。

引文中的前四句是偈頌,其後各句則是註釋。文中所謂「取轉迴」,在巴達恰亞的英譯本《迴諍論》中,作「認知事物並肯定或否定其存在」[27]。註釋中的譯文相當晦隱難懂,巴達恰亞的英譯卻很清晰:
如果我經由現、比、譬喻和阿含等四量,或經由其中之一而認知某物,那麼,我將確實有所肯定或否定。(但是,)由於我甚至並不認知任何種類的事物(yathārtham evāhaṃ kaṃcin nopalabhe),我既然無所肯定也無所否定(tasmān napravartayāmi na nivartayāmi)。在這種情形下,你的批評(yo bhavatopālambha uktaḥ)——「如果你經由現量等(四)量之一而認知事物,然後否定了該物,那麼,那些量並不存在,而經由它們才被認知的事物也並不存在(taiś capramāṇair api gamyā arthāḥ)」——(這種批評)與我完全無關(sa me bhavaty evānupālambhaḥ)[28]。

顯然,龍樹以為,由於被認知的外在事物,以及能認知的四種工具——四量,

p. 117

都是空而不實的,因此,當他「告訴我人」(jñāpayate)「一切皆空」時,他並沒有肯定(「空性」的存在),也沒有否定(外在事物或四量的「自體」)。他的目的只在幫助我人去除錯誤的認知作用,使我人從「實有」的錯誤認知,轉向「空性」的正知。所以他說:「我宗無物」(我沒有任何主張,nāsti ca mama pratijñā)[29]。

(二)第二批判

以上是龍樹對「量」的第一批判,也是最重要的批判。在這一批判當中,龍樹不但否定了「量」的真實存在性,而且(雖然他強調「我沒有任何主張」,但卻也)提出了他的一貫主張——「一切皆空」。
在下面的幾個批判當中,龍樹用了他那有名的歸謬證法(應成法),進一步指出「量」之內在矛盾,以便否定它們的真實可靠性。首先,他說:
若量能成法,彼復有量成;汝說何處量,而能成此量?此偈明何義?若汝意謂量能成物,如量、所量,現、比、阿含、喻等四量,復以何量成此四量?若此四量更無量成,量自不成。若自不成,能成物者,汝宗則壞[30]。

引文的前四句是《迴諍論》的偈頌,其餘則是註釋。龍樹的意思是:四量倒底需不需要其他的量,來證明其成立?(1)如果四量需要其他量才能證明其可靠性,那麼,試問,所謂其他量,是指什麼?(2)反之,如果四量不需要其他量就可成立,那麼,你們正理學派所主張的——一切事物都必須經由量才能證知,即成了錯誤的說法。顯然,龍樹採用了窮舉證法(proof by cases)中最簡單的形式——兩難式(dilemma)[31]來證明正理學派的主張是錯誤的。
在(1)與(2)的兩難當中,正理學派的學者自然不會掉入第(2)當中,因為那和他們的主張——一切事物都必須經由量才能證知,相違背。而第(1)難呢?正理學派有什麼反駁嗎?《迴諍論》說:
如有人言,我所說量自、他能成。而說偈言:『猶如火明故,能自照、照他;彼量亦如是,自、他二俱成。』此偈明何義?如火自照,亦能照他;量亦如是,自成、成他[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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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理學派所提出來的這一反駁,幾乎一字不差地出現在《正理經》當中[33]。《正理經》Ⅱ.Ⅰ.17-19.說:
反對者(指龍樹等中觀派)接著說:如果正知的對象必須經由量才能證明其真實性,那麼,後者(指量)也必須經由其他量才能證明其可靠性。(以上第17頌。)他(指反對者)繼續說:或者,如果量不經由其他量即能證明其可靠性,那麼,就讓正知的對象也不必經由量而獲得證明其真實性吧﹗(以上第18頌。)並非如此。量像燈火的照明一樣地被證明其可靠性 [34]

顯然,正理學派用燈火的照明做為例子,來說明量的可靠性。龍樹以為,能正確認知外在事物的量,和外在事物(亦即引文中的「正知的對象」),二者都是立於同等的品類——範疇(category),因此,如果外在事物——「正知的對象」必須用量才能認知,那麼,能認知的量本身,也必須用其他量來認知;如此,即有無窮的量,這顯然是一種缺憾。反之,如果四量不必其他的量就能自己成立,那麼,為什麼與它們立於同一範疇的外在事物,卻必須經由量才能證知呢?《正理經》Ⅱ.Ⅰ.在註釋第18頌時,曾把中觀學派的這些理由,清楚地重述出來:
如果你想證明量或正知的對象,那麼,二者屬於同一範疇(category)。依照反對者看來,如果該量被視為自明的(self-extablished),那麼,正知的對象也必須視為自明的。在這種情形下,現、比等量將是多餘的[35]。

《正理經》Ⅱ.Ⅰ.19.及其註釋對於中觀學派的這一問難,集中在量與正知對象的不同性的說明。在註釋中說,量與其證知的事物——正知對象,儘管有其相似之處,但卻不屬同一範疇。它說:
一盞燈火照明了一只瓶子,而我們的眼睛則照明(即看見)了那盞燈火。雖然有時是燈火,有時是眼睛,那種照明(illumines),你必須承認是照明者(illuminator)的一種普遍觀念(general notion)。同樣地,你必須承認量是獲得正知之方法的一種普遍觀念,有別於正知的對象。當然,方法(means)與對象(object)不可視為同一範疇[36]。

依照引文看來,正理學派以為,四量屬於「方法」(means)的範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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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其所要證知的對象——外在事物,則屬於「對象」(object)的範疇,二者有本質上的差異,所以不能像中觀學派那樣,以為外在事物既然需要用四量來證知,就推論到四量也必須用其他量來證知。
事實上,上面那段《正理經》Ⅱ.Ⅰ. 19.的偈頌,也有不同於前面引文的註釋:
就像燈火照明它自己和其它事物一樣,量證明了它們自己和正知對象的真實性。因此,現量證明了它自己和感官對象的真實性[37]。

這段《正理經》Ⅱ. Ⅰ. 19.的註釋,和上引《迴諍論》文的意思比較接近。而《迴諍論》的反駁是:
汝語言有過,非是火自照;以彼不相應,如見闇中瓶。此偈明何義?彼量如火,自、他能成難,不相應。何以故?非火自照。如初,未照闇中瓶等,不可得見;以火照已,然後得見。如是,如是,若火自照,初火應闇,後時乃明。如是得言火能自明。若初火明,則不得言火能自照。如是分別火自、他照,義不相應[38]。

龍樹的反駁,明顯地以為,正理學派有關燈火的比喻,是不恰當的比喻;因為,龍樹以為燈火只能照明他物,無法自照。他透過「照(明)」一詞的語義分析,來達到否定燈火自照的結論。他分析說:所謂的「照(明)」,必須由原先的黑闇,到照明後的光亮;就像燈火把黑闇中的瓶子,照明而成光亮中的瓶子一樣。他又說:如果燈火能照明,那麼,依據「照(明)」的這一定義,它必須原先黑闇的,後來才變成光亮的。而事實不然,燈火打從被點亮時,就一直是光亮的。所以,龍樹又說:
於火中無闇,何處自他住?彼闇能殺明,火云何有明?此偈明何義?火中無闇,火處無闇,云何名為明能破闇?若彼火中如是無闇,何處有闇,火能破闇?若當無闇可破滅者,云何而得自他俱照[39]?

引文中,龍樹說到火中或火處並沒有黑闇存在,因此燈火並沒有把火中或火處之黑闇照明成光亮,可見不合乎「照(明)」的字義。
但是,正理學派的學者也許會說:並不是點燃了燈火之後,火中或火處存在著黑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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然後燈火才把該一黑闇「照明」而成光亮。事實上,當燈火剛被點燃的一開始,它就「照明」了它自己[40。對於正理學派的這一反駁,龍樹回辯說:
如是火生時,即生時能照,火生即到闇,義則不相應。此偈明何義?若火生時能自他照,義不相應。何以知之?如是初火不能到闇。何以知之?若未到闇,不能破闇。若不破闇,不得有明[41]。

龍樹的意思是:燈火剛被點燃時,無法「到闇」。既然無法「到闇」,就無法把黑闇破除而成光明。問題是:什麼叫做「到闇」?巴達恰亞的英譯本《迴諍論》,把「到闇」一詞,譯成:「與黑闇接触」(come in contact with darkness)[42]。而在龍樹的另一作品《中論》當中,有相似的偈頌;其中,「到闇」一詞譯成了 「及於闇」[43。事實上,它們都是梵文 prāpnoti tamo的翻譯 [44]。其中,prāpnoti乃「到」的原文,由動詞pra-āp變化而來。而prā-ap則有達到、抵達、遇到等意思[45]。依此看來,龍樹把站在實在論立場之正理學派所主張的燈火與黑闇,當做兩個實體的存在物,就像一顆橘子與一只香蕉一樣,可以彼此接近而緊密地接触在一起。這種接触在一起的狀態,就叫做「到」。龍樹以為,如果像正理學派所說的那樣,火中或火處根本沒有黑闇的存在,燈火打從一開始就能自己照明,不必與黑闇接触(到)之後,才把黑闇破除了,那麼,就有下面的困難產生:
若火不到闇,而能破闇者,火在此處住,應破一切闇。此偈明何義?若汝意謂火不到闇能破闇者,火此處住,則應能破一切世間所有處闇。何以故?俱不到故。而實不見有如是事。若俱不到,云何唯能破此處闇,不破世間一切處闇?若汝意謂火不到闇而能破闇,義不相應[46]。

龍樹的意思是:如果火中或火處沒有黑闇存在,使得燈火不必接触(到)該一黑闇,就照明了燈火自己,那麼,此處的燈火也應破除(照明)他處的一切黑闇。為什麼呢?因為,燈火沒有接触(到)他處的黑闇,和沒有接触(到)火中或火處的黑闇既然都相同,那麼,燈火既然能夠自照,它也應該能夠照明他處的一切黑闇才對。
以上有關燈火的論證,龍樹似乎是在討論燈火的不能自照;但實際上卻在證明量的無法證明自己的成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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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顯地,儘管正理學派以為量之方法(means)與量之對象(object)屬於不同的兩個範疇,以致有其本質上的差異;但是,龍樹仍然認為二者同屬一個範疇,以致如果外物(正知對象)必須經由量來證知,那麼,量也必須經由其他的量來證明其可靠性。在龍樹看來,量由他量來證明是不可能的(因為這樣一來就有無窮後退之過),因此,正理學派有關量的主張,自然是困難重重的。
龍樹為什麼會把量和所量(prameya)——正知對象視為同一範疇呢?原因是基於他那量與所量二者相依相成的「緣起」(因緣生,pratītyasamutpanna)思想。也就是說,量是相對於所量而存在的;反之,所量也是相對於量而存在的。沒有量,就沒有所量;沒有所量,也就沒有量。二者相待而成。因此,依據龍樹 「眾因緣生法,我說即是無」[47的主張,量與所量都是空幻無實的。有關這一點,應該是龍樹對於量的第三批判了。

(三)第三批判

龍樹把量與所量視為相待的「緣起」法,而歸入同一範疇之中,這在《迴諍論》中說得相當清楚:
若量能自成,不待所量成,是則量自成,非待他能成。(以上第一頌。)不待所量物,若汝量得成,如是則無人,用量量諸法。(以上第二頌。)若所量之物,待量而得成,是則所量成,待量然後成。(以上第三頌。)若物無量成,是則不待量,汝何用量成,彼量何所成?[48]

在這四首《迴諍論》的偈頌當中,第一首的註釋說: 「若汝意謂量與所量,如火成者,量則自成,不待所量[49]。」龍樹的意思是:如果量像燈火的自照一樣,也能自己證明自己成立的話,那麼,量就不必依靠所量(其所證知的對象)即可自己成立。也就是說,龍樹以為所謂的「自己證明自己成立」(自成,svatah sid-dhih)[50],是指不必依靠他物即能自己成立的意思;相反地,凡是必須依靠他物才能成立的事物,都不是「自己證明自己成立」(自成)的事物。因此,龍樹說: 「若自成者,則不待他;若待他者,非自成故[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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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這種定義下,正理學派的四量既然是「自成」的,就必須是不必依靠所量的對象即已存在的實體。然而,這種獨立自存的量,龍樹認為是不可能存在的;所以在第二頌中,他說:「不待所量物,若汝量得成,如是則無人,用量量諸法。」(詳前文。)龍樹的意思是:如果量是「自成」的實體,不必依靠所量的助成,那麼,量與所量之間的相對關係即不存在。這樣一來,我們也就無法用量來證知所量的存在了。上引《迴諍論》第二頌的註釋當中,龍樹把他的這些想法,表達而成下面:
若汝意謂不待所量而量得成,則無有人用量量法。有如是過。若何得人需用量者,不待所量而得有量[52]。

其中,「無有人用量量法」一句,在巴達恰亞的英譯本《迴諍論》中作:「那些量就無所量了」(those pramāṇas are pramāṇas of nothing)[53];意思是:量就成了沒有對象的量了。另外,引文最後一句——「若何得人……而得有量」,英譯本作:「但是,如果量是某物之量(pramāṇas are pramāṇas of something),那麼,它們就不能變成獨立於認知對象的認知工具[54]。」
總之,從上引《迴諍論》中的第一、二首偈頌看來,龍樹以為量是不能獨立於所量而「自成」的;因為,量若「自成」,就會產生無所量(沒有量的對象)等過錯。這一批判,顯然是建立在「自成」(svataḥ siddhiḥ)一詞的語意分析上。
事實上,上引《迴諍論》中的第一、二首偈頌,只是龍樹整個兩難論證(dilemma)的前半——當量不必依存於所量時。而下面所要討論的第三、四首偈頌,則是這一兩難論證的後半——當量依存所量時。在這後半當中,龍樹再度指出:即使量依存於所量,仍然有錯誤存在。現在詳論如下:
第三首偈頌,巴達恰亞的英譯本《迴諍論》譯作:
然而,如果量相依於所量(prameya)而被證明,所量即不能相依於量而被證明。(以上第三頌。)而且,如果所量(已經)獨立於量而被證明,你證明量又會有什麼用處呢(kiṃ te pramāṇasiddhyā)? 它們所能提供的目的〔已經〕被證明了(tani yadarthaṃ prasiddhaṃ tat)。(以上第四頌。)[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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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第三頌中,龍樹以為:如果量的存在必須依靠所量才能證明,也就是說,量能證知所量的真實性,那麼,量即是「能證知」(sādhana),而所量是「所證知」(sādhya)。「所證知」的所量既然是被「能證知」的量所證明,那麼,「所證知」的所量就不能反過來證明「能證知」的量是成立的。所以,龍樹說:
……所證知(sādhya)的對象,不能證明能證知(sādhana)的工具。而量確實是能夠證明所量的工具(sādhanāni ca kila prameyānām pramānāni)。[56]

總之,前引第一~四首《迴諍論》的偈頌,乃是龍樹慣用之兩難式(dilemma)的全部。在這一個兩難式的論證中,龍樹所要證明的結論依然是:量不是「自成」的。下面即這一兩難式論證的簡化:
量依存於所量,或者量不依存於所量;
如果量依存於所量,則量不能被證明;
如果量不依存於所量,則量沒有所量的對象;
所以,量不能被證明,或者量沒有所量的對象。

兩難式中的第二個前提,即是上引第三、四頌的簡化[57;第三個前提,則是第一、二頌的大意。而結論中的兩種情形——「量不能被證明」與「量沒有所量的對象」,自然都是正理學派所無法接受的。這樣,龍樹就達成他批判正理學派的目的了。另外,值得注意的是:兩難式中的第二、三個前提,都是依照歸謬證法,亦即「應成法」(prāsaṅgika-annmāna)而證明成立的。(詳見註解⑧。)
以上三個批判,是龍樹對於正理學派「量是實有」之主張而提出來的。在第一批判當中,龍樹提出了自己的主張「空」,然後駁斥量、所量、以及「所遮」(甚至包括「能遮」與「遮」)的真實存在性。這可以說是「形上學的」(metaphysical)批判。在第二批判當中,龍樹從方法論(methodology)上指出:量與所量乃屬同一範疇的兩個概念,因此量也和所量一樣,必須被其他的量所證明;但是,如此一來,即有無窮量之過錯。所以這是「方法論上的」批判。而在第三批判當中,龍樹構作了一個兩難式的論證,探討量與所量之間的依存關係,以證明量的並非「自成」。這可以稱為「相關性的」(relativistic)批判;也可稱為「緣起論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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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tītyasamutpanna)批判。這三個批判,構成了龍樹對於「量」之理論。而他的結論則是:
量非能自成,非是自、他成,非是異量成,非無因緣成[58]。

三、「量」與「二諦」的關係

從上文看來,無可置疑地,龍樹在《迴諍論》中確實激烈地批判了正理學派所主張的四種認知的工具——「量」。然而,引文中我們也說過,龍樹在他的作品當中,卻又自己大量採用了「比量」——邏輯的推論;這特別是指窮舉證法(例如「兩難式」)和被後代中觀派學者稱為「應成法」的歸謬證法[59]。事實上,即使在《迴諍論》中,龍樹也明顯地用到了兩難式和應成法;上文第三批判中所引用的第一~四頌,即是一個實例。
更有甚者,龍樹的《中論》當中,不但大量地應用了窮舉證法和歸謬證法(應成法)而且還非常相似地用到了因明(Hetu-vidyā)中的「三支作法」[60]。例如,《中論(卷四).觀邪見品(第27)》,第22頌即說:
五陰常相續,猶如燈火炎,

以是故世間,不應邊無邊

[61]。

頌文的第一句可以看作是「因支」(即理由,hetu),第二句可以看作是「喻支」(即實例,udāharṇa),而後兩句則是「宗支」(即主張或結論,pratijñā)。這樣,頌文即可改寫成下面的「三支作法」:
宗:世間(即實有,pravartate)與有邊或無邊不相應;
因:因為(世間之)五陰相續流變的緣故;
喻:凡是相續流變的事物都是與有邊或無邊不相應的,例如燈焰。

龍樹的頌文不是嚴格意義的「三支作法」,因為原文中「因支」與「喻支」並沒有分開,而是合成一句。也就是說,頌文的第一、二句,在原文中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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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andhānāmeṣa saṃtāno yasmāddīparciṣāmiva / pravartate tasmannantanantavattvaṃ ca yujyate //[62]

其中,skandhānām 是「八轉聲」(aṣṭavibhaktayaḥ)[63]中的「屬聲」(svāmivacane),亦即文法中的「所有格」(屬格,genitive case);因此應該譯為「(眾多)五陰的」。同樣地,dīpārciṣām也是屬聲,應譯為「(眾多)燈焰的」。這兩個形容詞都是用來形容主詞 eṣasaṃtānaḥ(這個相續)。因此,前半頌應該譯為:「由於(yasmāt)(眾多)五陰的(這個)相續,就像(iva)(眾多)燈焰一樣」;甚至,更精確地應該譯為:「像(眾多)燈焰一樣的(眾多)五陰的(這個)相續」。顯然,這並不是一個完整的句子,而只是一個句子的主詞(subject)而己[64]。即使再加上下半頌的第一個字 pravartate〔意思是:它(指相續)在進行著〕,而成完整的句子,但也只是下面一句而已:「由於像燈焰一樣的五陰的相續正在進行著」[65]。可見前半頌並沒有真正獨立的「因支」與「喻支」[66]。因此,上引頌文依照梵文原典看來,並不是一個真正的「三支作法」。而實際上,「三支作法」的理論,遲至第五世紀,才由陳那(Dignāga; A.D. 400-480)所建立起來[67];龍樹是第二~ 三世紀的人,自然不可能採用嚴格意思的「三支作法」。
儘管如此,正如上文所說,《中論》中的這首偈頌,已經非常接近「三支作法」的形式,而它本身顯然也是一個邏輯上的推理方式——比量,因此,龍樹的作品當中,大量地採用比量,是一個不容懷疑的事實。
龍樹既然在他的作品當中大量採用比量,為什麼卻又在他的《迴諍論》中,嚴厲地批判正理學派所提出來的四量呢?而這二者之間的矛盾,又如何解消呢?筆者以為,要回答這些問題,必須說到龍樹的二諦論。
二諦是俗諦(世俗諦,saṃvyavahāra-satya 或 vyavahārasatya)與真諦(第一義諦,paramārthasatya)。前者是指一般的世間常識;後者則指超越世間的(解脫世間的)究竟真理。龍樹在《迴諍論》中,曾這樣地用到了這兩個概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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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依於世諦,故作如是說。此偈明何義?……又我所說,不違世諦,不捨世諦。依世諦故能所一切諸法體空。若離世諦,法不可說。佛說偈言:『若不依世諦,不得證真諦;若不證真諦,不得涅槃證。』[68]

引文中的最後一首偈頌,幾乎完全一樣(只有最後稍有差別)地出現在《中論(卷四).觀四諦品(第24)》的第10頌當中[69]。
這段引文,在《迴諍論》中是用來回答正理學派的問難:如果一切皆空,那麼「一切皆空」這句話本身也是空;如果「一切皆空」這句話也是空,那麼這句話就無法否定事物的真實性,因為一個空的東西並沒有否定的作用。龍樹的回辯則是:並不是空的東西都沒有它的功能或作用;也並不是空的東西就不能用語言來描述它。在超越世間的究竟真理——「真諦」當中,一切皆空,沒有功能與作用,也沒有語言能夠描述它;但是,在一般的世間常識——「俗諦」之中,卻可以有功能與作用,也可以用語言來描述。這是龍樹對於正理學派之問難的回辯[70]。在這一回辯當中,龍樹並沒有論及「量」的問題。因此,我們可以追問的是:在「真諦」當中,一切皆空,當然包括正理學派所提出來的四量,也在否定之列。但是,在「俗諦」當中,龍樹是否允許四量的存在並承認它們的功能與作用呢?答案是肯定的。我們的理由有二:(1)《迴諍論》中明文說到了俗諦的功能;(2)《中論》中明文說到「空」是為了建立一切法。
就(1) 點理由來說,上引《迴諍論》文「若離世諦,法不可說」,依巴達恰亞的英譯本,應作:「如果不依靠俗諦,就不可能教導絕對的真理(法,dharma)。」[71]可見俗諦的功能在透過它來教導絕對的真理——「法」。這意味著為了要把絕對的真理詮釋清楚,不惜利用一般世間所認可的各種常識,其中自然包括四量在內,來當作暫時的工具。我想,這就是龍樹為什麼一方面主張一切皆空,因此四量也空,而另一方面卻又大量採用比量來證明其主張的原因。依照龍樹看來,一切皆空(因此四量也空)是他所謂的絕對真理——「法」;而俗諦中的比量,正是可以達到教導這一絕對真理之目的的一種工具。
其次,就第(2) 點理由來說,《中論(卷四.觀四諦品(第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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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開頭即說到外人批評龍樹的「空」破壞了佛所說的四諦、四果、四向、以及三寶等有關「罪福」的道理。緊接著,龍樹則反駁說:所謂的「空」,不但不會破壞「罪福」的道理,而且相反的,正是為了建立起 「罪福」的道理,才要主張 「空」[72]。龍樹下結論說: 「以有空義故,一切法得成;若無有空義,一切則不成。」[73]依此類推,龍樹雖然站在一切皆空的立場,否定了正理學派的四量,但是,事實上他卻給予四量一個之所以能夠成立的理論基礎。龍樹有關「空」的哲學,乃立基於「因緣生」(緣起,pratītyasamutpanna)的理論基礎;所以他說: 「眾因緣生法,我說即是無(空,śūnyatā)。」又說 「未曾有一法,不從因緣生,是故一切法,無不是空者[74]。」因此,就四量而言,四量乃依存於其「所量」(prameya)而有;沒有「所量」四量也就不成其為四量。就這個(因緣生的)意義而言,龍樹說四量是「空」的。這種意義的「空」,否定的只是四量的獨立性。龍樹把這種不必依存於其他條件(因緣)的獨立性,稱為「自性」(svabhāva)。因此,所謂四量是「空」的,意思是四量沒有「自性」;亦即四量是「自性空」(無自性,nihsvabhāva)。
四量的「自性」雖然是空的,但它們仍然可以有各自不同的功能或作用。龍樹曾在《迴諍論》中舉了「化人」(nirmitaka)與「幻人」(māyāpurusa)為例,來說明一個「空」的東西,仍然有它的功能或作用。他說:
化人於化人,幻人於幻人,如是遮所遮,其義亦如是。此偈明何義?如化丈夫於異化人,見有去來種種所作,而便遮之。如幻丈夫於異幻人,見有去來種種所作,而便遮之。能遮化人彼則是空;若彼能遮化人是空,所遮化人則亦是空。或所遮空,遮人亦空。能遮幻人彼則是空;若彼能遮幻人是空,所遮幻人則亦是空。若所遮空,遮人亦空。如是,如是,我語言空,如幻、化空。如是空語能遮一切諸法自體。是故汝言汝語空故則不能遮一切諸法有自體者,汝彼語言則不相應[75]。

此處,所謂「化人」(nirmitaka)是指人造的人(artificially created person)[76],類似中國古代高僧所說的「機關木人」;而「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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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āyāpuruṣa)則是指魔術師所變化出來的人。這兩種人自然都是不真實的(人),亦即是「空」的(人)。但是,這兩種「空」的人,卻能夠阻止(遮,pratiṣedhayeta)另外兩種「空」的人,去做某些事情(去來種種所作)。也就是說,甲化人(即註釋中的「化丈夫」)(遮)乙化人去做某些事情[77]。而能阻止(能遮)的甲化人和甲幻人,是空的;被阻止(所遮)的乙化人和乙幻人,也是空的。
龍樹舉這兩個例子的目的,乃在說明作為「能遮」的語句——「一切皆空」,以及作為「所遮」的一切事物(自然包括四量),雖然都像甲、乙幻人、化人一樣,都是空的,但是「遮」(阻止)的作用卻仍然可以存在。可見,一個「空」的東西,並不是就沒有它的功能或作用。
這樣看來,龍樹儘管否定了正理學派所提出來的四量,說它們都是「空」的;但是,所謂的四量是「空」,意思僅僅止於四量的沒有「自性」,亦即僅僅止於四量無法獨存於其「所量」的事物之外。龍樹並不進一步否定四量的功能或作用。這也許就是他之所以依然大量採用比量的原因吧?
龍樹在他的《中論(卷四).觀四諦品(第24)》,第18頌說到:「因緣生」的意義就是「無」(空,śūnyatā),就是「假名」(prajñāpti),也就是「中道」(madhyamā-pratipad)[78。因此,當他說四量是「空」(無)時,他的意思是:四量乃依存於其他的條件(例如「所量」)而存在——「因緣生」。而且,四量是「假名」。在此,所謂假名,是指為了把自己已知的消息(道理)教導、或傳遞給別人,因此而彼此同意、約定的一種表達方式[79]。例如,就四量而言,它們雖然都是空的,但是,為了要把佛教的真理——「一切皆空」教導其他的眾生,因此,也不妨採用這些世間人共同約定的認知方法,來達到教導「一切皆空」的目的。這是為什麼龍樹一方面激烈地否定正理學派的四量,另一方面卻又大量採用比量的原因[80]。龍樹就把這種一方面否定事物(例如四量)的真實性,二方面又肯定其世俗功能——教導、傳遞消息的功能,稱為不偏不倚的中庸之道——「中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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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結論

上文說到,在龍樹的哲學當中,一切皆空的「真諦」與不妨是有的「俗諦」之間,不但不相矛盾,而且二者之間還存在著依存的關係。因此,真諦當中儘管四量都是空的,但是,俗諦當中,為了教導眾生的目的,不妨把四量當做方便的工具——「假名」。
在龍樹的哲學裡,一方面採取否定的立場,二方面卻又肯定了許多世俗的價值,是常常見到的事情。在《迴諍論》和《中論》中,他用「真諦」與「俗諦」,乃至「無」(空)與「假名」等兩組概念,來解消二者之間所存在的可能矛盾。而在《大智度論》當中,他又採用「四悉檀」與「二道」的說法,來統攝二者之間的關係。
《大智度論》卷一,曾把佛法區分為二種「悉檀」(siddhānta)[81]: (1)世界悉檀;(2)各各為人悉檀;(3)對治悉檀;(4)第一義悉檀[82]。其中,前三者是指世俗的常識(世界),或為特定對象而說的道理(各各為人),乃至為了治療特殊煩惱而設定的法門(對治)。而最後的第一義悉檀,則是指超越世間的究竟真理。因此,從「如如法性」或「實際」而言,前三悉檀都只是方便施設,因此都是虛妄不實的道理;相反地,第一義悉檀則是真實的道理。所以, 《大智度論》卷一說:「如如法性、實際,世界悉檀故無,第一義悉檀故有;(各各為)人等亦如是。」[83]但是,從解脫前的凡夫階位來看,世俗的一切(世界悉檀等)不妨看成是有,只有第一義悉檀才是空的。所以, 《大智度論》卷一又說:「世界悉檀(等)故有,第一義悉檀故無。」[84]在此,第一義悉檀即是《中論》和《迴諍論》中的「真諦」和「無」(空),而前三悉檀則是「俗諦」和「假名」。所以,四量的空,乃是依據第一義悉檀而言;而四量的大量採用,則是依據前三悉檀的方便手段。
龍樹在他的《大智度論》卷七十一,還說: 「二人者,般若及方便。般若波羅蜜能滅諸邪見煩惱戲論,將至畢竟空中。方便將出畢竟空。」[85]這是註釋《摩訶般若波羅蜜經(大品般若經).譬喻品(第51)》的一段論文。經中用五種譬喻,說到一個雖然「有信、有忍、有淨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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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深心、有欲、有解、有捨、有精進信」
的菩薩,如果沒有「般若(之)方便」,依然會 「中道(中途)衰耗,墮聲聞、辟支佛地」;因為信、忍、乃至精進信等,都只是 「世間功德」的緣故[86]。龍樹在註釋這段經文時,一開頭即說有兩種菩薩: 一、得諸法實相;二、雖未得實相,但在佛道當中卻有信、有忍、乃至有精進信者[87]。最後則下結論說,這兩種菩薩都必須具足般若與(般若之)方便,才能成就解脫之道[88]。
在《般若經》中,「般若」(prajñā)一詞通常被視為是理解一切皆空的一種超越的智慧[89。而「方便」(upāya),其梵文字義是:接近(目的)、前進、抵達、達到目的之方法、打敗敵人的手段、計謀、策略等[90]。《大般若經(卷329).初分巧方便品(第50之2)》曾有一段有關「方便」的經文:
一切法空,皆不可說。如來方便,說為無盡,或說無數,或說無量,或說無邊,或說為空,或說無相,或說無願,或說無作,或說無生,或說無滅,或說離染,或說寂滅,或說涅槃,或說真如,或說法界,或說法性,或說實際。如是等義,皆是如來方便演說……如來甚奇,方便善巧。諸法實相,不可宣說,而為有情方便顯示[91]。

依此看來,所謂「般若」,乃是證得一切皆空之絕對真理的智慧。其所證得的真理,即是《迴諍論》和《中論》裡的「真諦」;佛、菩薩依此而宣說之道理,即是前文《大智度論》中所說的「第一義悉檀」。而所謂「方便」,乃是克服菩薩道中所可能遇到的困難——例如退轉為聲聞、辟支佛的小乘心,也是體悟「空」之絕對真理之後,為了教導眾生,而暫時採用的手段或方法。亦即是《迴諍論》和《中論》裡所說的「世諦」,或《大智度論》中所說的前三悉檀。而正理學派所提出的四量,從「般若」道的觀點來看,自然是空幻不實的;但從「方便」道而言,卻不妨是菩薩自證涅槃或度化眾生所可以採用的暫時性手段或方法。這是為什麼龍樹一方面嚴厲地批判四量,另一方面卻又在他的作品當中大量採用四量(特別是比量)的原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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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PRAMANA PRINCIPLE IN NÂGÂRJUNA'S VIGRAHAVYÂVARTANI


yang Huei-NanNâgârjuna's Vigrahavyâvartanî is regarded as a critique on the Nyâya School, one of the six philosophies of Indian Brahmanism. This school propounded the idea of four methods to achieve correct understanding, among which one, anumâna, was logical reasoning. The Vigrahavyāvartani held the view of everything being empty, and negated that anumâna and the other methods were actually valid. The first purpose of the present paper is to analyse the three main reasons which Nâgârjuna put forth to make this point.
Another purpose is to demonstrate that Nagarjuna, despite his refutation of the Nyâya's anumâna . quite often used this logical method himself. How can this contradiction be explained? The author of the present paper points out that, from the viewpoint of absolute truth, everything is empty wherefore not only the Nyâya's use of anumâna naturally bacomes illusory and unreal, but also Nagarjuna's . However, in relative truth, it is permissible to apply anumâna. Thus the seeming contradiction between Nâgârjuna's criticism on the one hand and his own free use on the other can be solved through the theory of the two truths.
[1] 量(pramāṇa),有測量(measure)、尺度(scale)、準則(standard)、權威(authority)等意思;引申而成獲得正確知識的方式。(參見:Sir Monier Monier-WilliamsM.A., K.C.I.E., A Sanskr-it-English DictionaryDelhiMotilal Banaridass, 1970, p.685, c.)量,是外在世界之「所量」(prameya)與認識外在世界之個人——「量者」(pramātā)之間的媒介或橋梁。也就是說,「量者」應用了「量」,來正確地認識「所量」。印度哲學中,由於學派的不同,對於「量」的數目到底多少,有很大的岐見。唯物學派(Cārvāka)只承認一種「量」,即「現量」(pratyakṣa),亦即感官知覺。佛教和勝論學派(Vaiśeṣika)承認有「現量」與「比量」(anumāna)二種「量」;其中,「比量」是指邏輯上的推論。數論學派(Sāṃkhya)則在兩量之外,又進一步承認了第三量——「阿含量」(āgama 或śabda),亦即權威人士所說的道理。而正理學派則主張有四量,新加的一量是「譬喻量」(upamāna),亦即類比。另外,彌漫沙學派(Mimāṃsā)的學者——婆巴卡拉斯(Prābhākaras),主張在四量之外,應該增加「義準量」(arthāpatti),亦即預設。而同屬彌漫沙學派的學者巴達斯(Bhāṭṭas)以及吠檀多學派(Vedānta),則主張有六量,新增加的一量是「無體量」(abhāvaanupalabdhi)。另外,古史傳(Paurāṇikas)則認為應有七種或八種量;新增加的是:可能性(sambhava)與傳說(aitihya)。〔以上參見:The Nyāya Sūtras of Gotama,(tr.by M.S.C.Vidyābhuṣana,) New DelhiOriental Books Reprint Co., p.2〕
[2] 參見:The Nyāya Sūtras of Gotamap.2.,四種「量」的中譯,都是依據後魏.毘目智仙共瞿曇流支所譯之《迴諍論》的譯名。(參見《大正藏》卷32,頁13,下。)
[3] 譬喻量(upamāna),即是比較(comparison)的一種。《正理經》I.I.6.曾有定義說:「譬喻是經由已知事物與某物之相似性,而獲知該物的知識。」(參見(註1)末所引書,p.3.)在註譯中並舉了一個例子說明:某人從林居者口中,聽說 bos gavaeus是一種像牛的林中動物。一次,當他到了森林裡時,看到了一種像牛的動物,於是,他知道此一動物即是 bos bavaeus。他之所以知道此一事實,依《正理經》之說,乃是透過「譬喻量」而得知。在此,牛是已知的事物,bos gavaeus 是未知的事物,但二者之間存在著某種相似性。認識者——量者(pramātā)透過所觀察到的這種相似性,而認知到一個原本未知的事物——bos gavaeus。所以《正理經》才會說:「譬喻是經由已知事物(牛)與某物(bos gavaeus)之相似性,而獲知該物(bos gavaeus)的知識。」
[4] 阿含量(āgama)又名「聖言量」(Śabda)。阿含(āgama)的字義是(水流的)過程、(血液等的)流出、源頭等意思;引申為傳統的教義或訓示(如種經中的《阿含經》)。(參見:Monier-WilliamsA Sanskrit-English Dictionary, p.129, c.)而聖言(sabda)的字義則是聲音,自然是指傳統歷史中有權威之聖者所說過的道理而言。《正理經》I.I.7.的註解中,列舉了三種「可信任的人」:大仙(ṛṣi)、聖者(ārya)和彌離車(mleccha,即外地人)。(參見:M.S.CVidyābhaṣanaThe Nyāya Sūtras of Gotama, p.4)
[5] 參見:《大正藏》卷32,頁13,下:頁14,中~下;頁16,上;頁19,上~20,下。
[6] 《正理經》目前的版本,並不是瞿曇所著的原貌,而是紀元後250-350 年間的作品。理由是:《正理經》Ⅱ.Ⅰ.及Ⅳ.Ⅰ.中,對於龍樹和其弟子提婆(Āryadeva; 175-275)的主張,做了許多批判。(參見:M.S.C.VidyābhusanaThe Nyāya Sūtras of Gotama,pp.x, 22-42,117,120.)因此這些部分不可能是瞿曇的思想。威迪亞布沙那(S.C.Vidyābhusana)甚至以為,《正理經》只有第Ⅰ篇是瞿曇的作品,其他Ⅱ~Ⅳ篇由於討論了勝論(Vaiśeṣika)、瑜伽(Yoga)、彌曼沙(Mimāṃsā)、吠檀多(Vedānta)和佛教等學派的教義,不可能出自瞿曇的手筆。而第Ⅴ章是一些詳細而瑣碎的回答、回辯,也不是出自慣於粗略回答之瞿曇的手筆。(參見:前書,頁x.)儘管《正理經》並非瞿曇原著之本來面貌,但是,至少它的第Ⅰ章篇,出自瞿曇的手筆。而四量說正好出現在第Ⅰ篇中(詳(註2)),因此,可以肯定的是:龍樹《迴諍論》所批判的四量,正是正理學派或甚至是《正理經》(第Ⅰ篇)中的四量。
[7] 《迴諍論》;引見《大正藏》卷32,頁35,中。
[8] 《中論》中用到了邏輯推論——比量,最明顯的例子是卷一,〈觀去來品第二〉中的證明沒有「去(法)」(亦即運動)。龍樹首先把「去」(運動)之可能存在的地方,分成了兩類:已去、未去、以及去時,亦即運動後、運動前、與正在運動時。他說,如果有「去」,那麼,「去」必定存在於已去、未去、去時三者之中。然後他說:「已去無有去,未去亦無去。」(引見《大正藏》卷30,頁3,下。)他的意思是,在運動結束以後(已去)和在運動尚未開始以前(未去),都沒有運動(去)的存在。這是很明顯的事實。因此,唯一可能有運動(去)存在的地方是正在運動時的「去時」。但是,龍樹卻接著否定說:「去時亦無去。」(同前引。)為什麼正在運動時也沒有運動的存在呢?他回答說:「若言去時(有)去,是人則有咎,離去有去時,去時獨去故。若去時有去,則有二種去,一謂為去時,二謂去時(中之)去。」(同前書,頁4,上。)龍樹的意思是,如果承認正在運動時,有運動的存在,那麼就有兩種運動(去),一是正在運動的時間(去時),另一則是時間之流當中的運動者(去時去)。前者是指時間的存在,後者則是附著在運動物體(如車輛或行人等)之上的運動狀態。而在龍樹一切事物都是「因緩生」(pratītyasamutpanna)的哲學預設之下,有獨立自存的時間(去時)和獨自存在的運動狀態(去時去),是矛盾而不可理喻的。因此,他總結地說:「去時亦無去。」在這一長段證明沒有「去」的論證當中,龍樹把「去」的可能存在之處,分類而成已去、未去和去時;這明顯地採用了窮舉證法(proof by cases,又名「分類證法」)。而在證明沒有「去時去」時,龍樹從「去時(有)去」的假設,推論到有兩種「去」(去時與去時去)的矛盾,然後否定了「去時(有)去」的假設,得到沒有「去時去」的結論;這是歸謬證法(reductio ad absurdum)的應用。龍樹的作品當中(不限於《中論》),常是這兩種邏輯推論的交互應用;而其中的歸謬證法,被後代的中觀學派的學者們,例如第七世紀前半的月稱(Candrakīrti);稱為「應成法」(prāsangika)(參見:T.R.VMurtiThe Central Philsophy of Buddhism, George Allen and Unuin,1955, p. 87.)
[9] 《迴諍論》;引見《大正藏》卷32,頁16,上。又見E.H.Johnston and AKunstThe Vigrahavyāvartanī of Nāgārjuna, in KBhattacharya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VigrahavyāvartanīDelhiMotilal Banarsidass, 1978, p.14.
[10] 原註,「何」乃「可」字之誤。(參見《大正藏》卷32,頁16,註①。)另外,同一首詩偈,重複出現在《大正藏》卷32,頁19,上時,「何」亦做「可」字,可見應是「可」字才對。
[11] 《迴諍論》;引見《大正藏》卷32,頁16,上。
[12] 巴達恰亞的英譯本《迴諍論》,名為「龍樹的辯證法(迴諍論)」(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Vigrahavyāvartanī)。由德里(Delhi)的莫提拉.班那西達斯公司(Motilal Banarsidass),在1978年出版。書本並附有強士通(E.H.Johnston)和庫恩特(A.Kunst)所合編的《迴諍論》梵本原典。
[13K.Bhattacharya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Vigrahavyārartanīp.9.
[14Ibid.
[15Ibid. 另外,原註說,偈頌最後說到的drsfānfa,是指譬喻量(upamāna)的意思,因為在《迴諍論》的註釋當中,一直都用「譬喻量」一詞。
[16] 《迴諍論》;引見《大正藏》卷32,頁16,上。
[17] 所謂「能否定的語言」,可以從下面的實例得到進一步的了解:當我們說「一切皆空」這句說時,這句話即是「能否定的語言」——「能遮」。同樣地,當我們說:「室空無馬」這句話時,這句話即是「能遮」。〔有笑「室空無馬」一句,出自提婆(Āryadeva),《百論》卷下;引見《大正藏》卷 30,頁 181,下。〕
[18] 引見《大正藏》卷30,頁181,下。
[19] 《正理經》Ⅱ.Ⅰ.12. 說:「如果現量和其他各量是不可能的,那麼,否定它們也是不可能的。」Ⅱ.Ⅰ.13.又說:「其次,如果你否定了(pratiṣedha)所有的量,那麼,否定(pratiṣedha)本身也是不可能的。」在註釋中又說:「如果你想證明任何事情(例如否定),你只能經由現、比、譬喻等量才有可能。如果你否定了它們,你就無法證明事物的存在。因此,你無法證明否定本身的真實性。」(以上見:M.S.C.VidyābhuṣanaThe Nyāya Sūtras of Gotama,New DelhiOriental Books Rrprint Corporation,1975, p.26.)從《正理經》的偈頌及註釋來看,正理學派確實主張否定(pratiṣedha,遮)的真實存在性。
[20] 同前書,卷30,頁181,下。
[21] 拙文〈龍樹《迴諍論》中的「空」之研究〉(刊於《華岡佛學學報》第8期,台北:中華學術院佛學研究所,民國74年),曾論及《正理經》的註釋者-瓦沙耶那(Vātyāyana;A.D.450-500),以為不存在的「非實有」(asadbhāva)是一種存在(bhāva),名為「能分別之所分別的存有」(višeṣyā-višeṣanā-bhāva)。這種「存有」,可以經由一種叫作「無體量」(anapalabdhi-pramāna)的認知工具,而認知其真實存在。而成立於西元50-150年間的《勝論經》(Vaiśeṣika-sūtras),在其註釋當中,也把「不存在」(asat),列入七種真實存在的範疇——「句義」(padārtha)當中,並且可以經由「對比」(contrast)而認知其存在性。可見,把不存在的「無」或「無馬」視為一種存有,是印度許多學派的共同主張。
[22] 參見註解⑧。
[23] 《迴諍論》;引見《大正藏》卷32,頁21,下~22,上。其中,最後一句的「枉」原作「抂」,但原註說,在宋、元、明三本,以及宮內省圖書寮本(舊宋本)當中,「抂」階作「枉」。因此本文改正為「枉」。另外,同句最後一字原本做「成」。但原註說,明本作「我」。(以上皆見《大正藏》卷網英譯本《迴諍論》,亦作「我」(me),因此改正如文。〔K.Bhattacharya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Vigrahavyāvartanip.40~41.〕
[24] 引見:K.Bhattacharya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Vigrahavyāvartanipp.40~41。
[25] 有關「告訴我人」(jñāpayati)一詞,出自《廻諍論》:「以無法體,知無法體;以有法體,知有法體。」(引見《大正藏》卷32,頁32,上。)其中的「知」字,即梵文jñāpayati的漢譯。K.Bhattacharya的英譯本《廻諍論》,把這兩句譯成下面:「由於沒有自體(asati svabhāve),因此,語言(指「一切皆空」一句)告訴我人(jñāpayati)事物都是沒有自體的(bhāvā nihsavabhāvā iti)。」〔見: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Vigrahavyāvartanīp.42]依此看來,所謂的「室」,並不是把一個原本存在的事物之「自體」(svabhāva,又譯「自性」)否定掉,它的作用只在糾正我人把不存在的「自體」誤為存在的這一錯誤而已。也許,這就是《維摩詰所說經》卷中(文殊師利問疾品第五)所說的「但除其病,而不除法」吧?(引見《大正藏》卷14,頁545,上。)
[26] 《迴諍論》;引見《大正藏》卷32,頁19,上。
[27] 引文中的第一句偈頌,KBhattacharya 譯作:「如果我經由現量等量,而後認知某物,那麼,我將有所肯定或否定(pravartayeyaṃ nivartayeyaṃ )。(但是,)由於事物並不存在,我並沒有過錯(tadabhāvān me 'nupālambhaḥ)。」〔見:The Dialectical Method ofNāgārjunaVigrahavyāvartanīp.24.〕因此,中譯本的「取」應是「認知某物」(apprehended something)的翻譯:「轉迴」則應是「肯定或否定」(either affirm or deny)的翻譯。
[28K.BhattacharyaThe Dialectical Method of NagarjunaVigrahavyavartani),pp.24-25.
[29] 「我宗無物」一句是漢譯《迴諍論》的論文。(引見《大正藏》卷32,頁19,上。)英譯本請見:K.Bhattacharya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Vigrahavyāvartanīp.23.其中,「宗」(pratijñā)是主張、結論的意思。
[30] 《迴諍論》;引見《大正藏》卷32,頁19,上。
[31] 有關龍樹所慣用的論證之一——窮舉證法,請見注釋8。
[32] 引見《大正藏》卷32,頁19,中。
[33] 這也是為什麼許多學者認為《正理經》的第Ⅱ篇成立於龍樹之後的原因。參見:中村元主編,葉阿月譯,《印度思想》,台北:幼獅文化事業公司,民國73年,頁163-164。
[34M.S.C.VidyābhuṣanaThe Nyāya Sūtras of Gotama, pp.27—28.
[35Ibidp.28.
[36Ibid.
[37Ibid.
[38] 引見《大正藏》卷32,頁19,中。
[39] 《迴諍論》;引見前書,頁19,下。
[40] 這一正理學派的反駁,被《迴諍論》寫成了下面數句:「若如是者,非火中闇,非火處闇。如是,如是,火自他照。彼火生時,即能破闇。如是火中無闇,火處無闇。如是火(初)生能照自他。」(引見《大正藏》卷32,頁19,下。)
[41] 引見《大正藏》卷32,頁19,下。
[42] 參見:K.Bhattacharya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Vigrahavyāvartanīp.29.
[43] 《中論(卷二).觀三相品(第七)》第十一頌說:「云何燈生時,而能破於闇﹗此燈初生時,不能及於闇。」(引見《大正藏》卷32,頁9,下。)
[44] 參見:E.H.Johnston and A.KunstThe Vigrahavyāvartanī, in K.Bhattacharya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Vigrahavyāvartanīp.35.
[45] 參見:Sir Monier Monier-WilliamsA Sanskrit-English Dictionaryp.707, b.
[46] 《迴諍論》;引見《大正藏》卷32,頁19,下。
[47] 《中論(卷四).觀四諦品(第二四)》,第18頌;引見《大正藏》卷30頁33,中。其中,「眾因緣生法」是梵文pratītyasamutpādaḥ的翻譯;而「無」字則是梵文sunyatam的翻譯,在其他的經論當中,也譯成「空」字。(以上參見:《大正藏》卷30,頁33,註解⑤。)
[48] 引見《大正藏》卷32,頁20,上。
[49] 同前引。
[50] 梵文svataḥ siddhiḥ 乃第一頌中的原文。例如第一句——「若量能自成」,原文作: yadi svataś ca pramāṇssiddhiḥ :最後一句——「非待他能(自)成」,則作:na parāpekṣā svataḥ siddhiḥ。(參見:K.Bhattacharya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Vigrahavyāvartanī,p.30.)而所謂svataḥ siddhiḥ,則是自己成就,自己確立,自己證實等意思;亦即自己在本質上的成立,不必依靠他物的證明。
[51] 《迴諍論》;引見《大正藏》卷32,頁20,上。
[52] 同前引。
[53] 參見:K.Bhattacharya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Vigrahavyāvartanīp.30.
[54Ibid.
[55Ibid., P.31.
[56Ibid.
[57] 對於兩難式的第二難,龍樹不但以第三、四頌來證明會導出「量不能被證明」的困難,而且,龍樹還用下面的第五、六頌,來證明量與所量「不相離」,以致量與所量「二種俱不成」的過錯:「若汝彼量成,特所量成者,是則量、所量,如是不相離。若量成所量,若所量成量,汝若如是者,二種俱不成。」(引見《大正藏》卷32,頁20,中。)其中,所謂「不相離」,巴達恰亞的英譯譯作「互換」(interchange),顯然那是梵文vyatyaya(交換、顛倒)的翻譯。〔參見K.BhattacharyaThe Dialectical Method ofNāgārjunaVigrahavyāvartanīp.31]龍樹的意思是:如果量必須依存於所量才能證明,那麼,量變成被所量所證明,所量變成能證明量的成立。這樣一來,量即是所量,所量即是量,二者的地位對換了過來。因此,二者也無法證明對方的正確性了。就像父生子、子生父,父子之間的關係(能生、所生的關係)錯亂了一樣,所以龍樹說:「為是父生子,為是子生父?何者是能生,何者是所生?為何者是父,為何者是子?汝說此二種,父子相可疑。」(同前書,頁20,中~下。)
[58] 《迴諍論》;引見《大正藏》卷32,頁20,下。龍樹的結論是:量不是自己能證明自己成立的,不是自己和其他事物能證明成立的,不是其他的量能證明其成立的,但也不是沒有條件它們就成立的。這相當於《中論(卷一).觀因緣品(第一)》的不自生,不(自、他)共生、不他生和不無因生。(參見:《大正藏》卷32,頁 2,中。)
[59] 參見註解⑧。
[60] 因明(Hetu-idyā),通常是指印度古代佛教,特別是瑜伽行派(Yogācāra),所發展出來的一套邏輯理論。世親(Vasubandhu; A.D.320-400)之前的因明,稱為「古因明」;陳那(Dignāga; A.D.400-480)之後的因明,則稱為「新因明」。(參見:沈劍英,《因明學研究》,上海: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1985,頁28。)古因明援用了正理學派的邏輯——「量」的理論,採用了五個支分(即部分,avayava),作為一個論證(比量)所必要的成分。通常即稱之為「五支作法」。五個支分是:宗(即主張,partijñā)、因(即理由,hetu)、喻(即實例,udāharana)、合(即應用,upanaya)、結(即結論,nigamana)。陳那的新因明,與古因明之間,有許多的差異,其中之一即是新因明省去了五支中的後兩支,而成三支,故稱「三支作法」。(參見前書,頁28-31)龍樹在《中論》裡所採用的「三支作法」,只能說是擬似的樣子,並不是嚴格地符合「三支作法」的形式;因此,筆者稱之為「非常相似」。
[61] 引見《大正藏》卷30,頁38,下。
[62] 引見:Kenneth KInadaNāgārjunaA Translation of his Mūlamadhyamakakārikā with an Introductory Essay, TokyoThe Hokuseido press,1970, p.169.
[63] 八轉聲乃梵文名詞語尾的八種變化(declension)。例如,五陰的原言是shandha;當它是單數(singular)而且是當主詞(subject)時,應該寫成shandhah;當它是多數(plural)主詞時,寫成 skandhāh;當它是單數所有格(genifive case)時,寫成skandhasya;而當它是多數所有格時,則寫成shandhānāon
[64] 完整句子的主詞在下半頌的第一個字pravartate,它是動詞字根pra-√ vṛt(進行、運轉)的第三人稱現在式。因此應譯為「它(指相續)在進行著」。如此一來,完整的句子應是:「(由於)像(眾多)燈焰一樣的(眾多)五陰的(這個)相續正在進行著」。而下半頌則應該譯為:「因此(tasimāt),它(指相續)不與有邊(anta)和無邊(an-anta)相應(相關連或相結合)」。〔其中antānantavattvam 是anta-ananta-vattvan的連結(sandhi),而vattva同是「相似性」的意思。〕
[65] 詳前註。
[66] 所謂真正獨立的因支與喻支,意思是因支與喻支(或至少是因支)必須是兩個單獨而完整的語句,而不僅僅是一個連結在一起的主詞。
[67] 參見註解60。
[68] 引見《大正藏》卷32,頁18,下。
[69] 參見《大正藏》卷30,頁33,上。又見:K.K.InadaNāgārjunap.146; EHJohnston and AKunst, The Vigrahavyāvartani of Nāgārjuna, p.29.
[70] 有關正理學派的這一個問難,以及龍樹的回辯,詳見:楊惠南,〈「空」否定了什麼?——以龍樹《迴諍論》為主的一個研究〉,《台大哲學論評》第八期,台北;台灣大學哲學系,1985,頁175-191。
[71] 引見:K.Bhattacharya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Vigrahavyāvartanīp.22.
[72] 詳見:《大正藏》卷30,頁32,中~34,下。
[73] 同前書,頁33,上。
[74] 同前書,頁33,中。
[75] 《迴諍論》;引見《大正藏》卷32,頁18,上-中。
[76artificially created person 是 KBhattacharya的翻譯;參見,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p.18. 梵文 nirmitaka乃由動詞字根nir-√ mi(用神通製造)的變化語。
[77] 在K.Bhattacharya的英譯中,乙化人和乙幻人分別由甲化人和甲幻人自己的幻化能力所製造(svamāyayā ṣṛṣṭam)出來。這樣一來,就更富趣味性了。(參見:The Dialectical Method of Nāgārjunap.18.)
[78] 原偈頌是:「眾因緣生法,我說即是無,亦為是假名,亦是中道義。」(引見《大正藏》卷30,頁33,中。)其中,依照梵文原典,「眾因緣生法」是 yaḥ pratītyasamutpādaḥ的翻譯,意思是指那些(yaḥ)由各種條件(因緣,pratītya)所生起(sam-ut pāda)的事物。〔在此,生起(samutpāda)一詞乃由動詞字根sam-ud-√ pad所變化而來。〕「無」又譯作「空」或「空性」,乃梵文 śūnyatā的翻譯,意思是:不存在、虛無、不真實。而「中道」應是梵文ma-dhyamā-pratipad的翻譯,但在原頌文中卻作:pratipad madhyamā。(其中,madhyamā是中間、中庸、平均值的意思,而 pratipad 則是抵達、涉足、發現、理想、學習的意思。)另外,「假名」是梵文prajñāpti 的翻譯。而prajñāpti 的原義有:教導、教示、消息、約定、同意等。(參見:Monier-WillianmsA Sanskrit-English Dictionary, p.659,a.)意思是為了要把消息教導他人或傳遞消息給他人,而彼此同意、約定的一種(教導、傳遞)方式。
[79] 詳前註。
[80] 在古代的中國,「假名」一詞往往被理解為不真實的「假有」。這如果不是一種誤解,就是一種引申的意思,而非它的原意。其實,在中文裡的「假」,固然有虛幻之「假有」的意思,但也有「假借」亦即暫時借用的意思。後者才是「假名」一詞的原義。
[81] 梵文siddhānta一般漢譯為「成就」,有最終目的、(論證之)結論、確定的意見或教理、公理(axiom)公認的真理等意思。(參見: Monier Monier-WillianmsA Sanskrit-English Dictionary, p.1216, a.這四種悉檀(即道理),能使眾生獲得利益,因此稱為「悉檀」(成就)。
[82] 參見:《大正藏》卷25,頁59,中。
[83] 同前書,頁59,下。
[84] 同前引。
[85] 引見:《大正藏》卷25,頁556,中。
[86] 參見前書,頁555,中~556,中。
[87] 同前書,頁556,上~中。
[88] 值得注意的是,上面引文中所說的「二人者,般若及方便」,並不是分別指這兩種菩薩。事實上,它是註釋經文中所舉的最後一個譬喻中的二人——「兩健人」。這兩個健壯的人就像般若與方便。能把行走在長遠之菩薩道中的病弱老人(譬喻菩薩)。扶持起來。繼續完成其未竟之業。(參見:《大正藏》卷25,頁556,上~中。)
[89] 例如,《摩訶般若波羅蜜經(卷三)。集散品(第九)》即說:「何者是般若波羅蜜?何以故名般若波羅蜜?……若法無所有、不可行,是般若波羅蜜……內空故。外空、內外空、空空、大空、第一義空、有為空、無為空、畢竟空、無始空、散空、性空、自相空、諸法空、不可得空、無法空、有法空、無法有法空故……。」(引見《大正藏》卷8,頁236,中。又見:《大智度論》卷43;《大正藏》卷25,頁369,中~371,中。)
[90] 參見:Monier Monier-WillianmsA Sanskrit-English Dictionary, p.215,b.

[91] 引見《大正藏》卷6,頁687,下。引文中最後的「方便善巧」,應是梵文upāya-kuśala 或 upāyakauśala 的翻譯。其中,kuśala譯為「善巧」,有正確、恰當、適當、良好、健康、巧妙等意思。而kauśala 也同樣譯作「善巧」,而有幸福、幸運、榮譽、成功、巧妙、聰明等意思。(參見Monier Monier-WilliamsA Sanskrit-English Dictionary, p. 297, b.p.317, c.)因此,所謂「方便巧善」,應指一種可以克服困難而帶來成功,幸福的方法或技巧。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등, 5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 획득되는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 등 5종 근현량과 그리고 법(法)에서 획득되어지는 의현량(意現量) 등 직관적 인식 가운데, 칸트의 선험성은 세 번째인 자증분현량과 유사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종교적 수행을 ‘포함하기 위해서’ 논리학적 개념을 정의하는 불교와 달리 종교적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서’ 발전한 독일 관념론과는 기본적으로 그 차이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직관적(perceptive) 그리고 개념적(conceptive)이라는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인식의 출발점부터 다른 이 불교 논리학과 독일 관념론의 차이성은 철학이 보편성을 띠고 있다지만 이것에 대한 비교 연구의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불교철학에 어떤 서구철학의 ‘~주의’를 붙이면, 우리가 제아무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이와 같은 각기 다른 출발점으로 인해서, 그 근본적인 차이를 놓칠 수밖에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