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1일 월요일

고려 불교 결사운동 지눌과 요세



고려후기의 신앙결사

                                                           채상식(부산대 사학과)

(이하 위 자료의 요약임)




1.개관



고려 귀족사회는 인종대 이후 여러 모순으로 말미암아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일어나고 뒤이어 무신의 난이 잇따르면서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불거졌다.

한편 13세기에 들어와 고려사회를 크게 변화시킨 대외적인 요인은 유목민종인 몽골의 흥기로 몽골과의 30여 년에 걸친 전쟁이다. 이 항전은 원종11년(1270)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함으로써 원나라에 예속되기에 이르렀다.



무신 난(의종 24년1170) 이전에는 의천(1055-1101)이 출현하여 문벌귀족과 결탁한 교종세력을 자각시키고, 나아가 왕실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존재인 문벌체제에 대항하여 왕권강화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최병헌,1975) 그러다가 그는 화엄종 내부의 균여 계통과 대립하기도 하였다.(최병헌.1980)



그리고 의천의 천태종 개창 과정에서 와해된 선종은 가지산문에서 학일(1052-1144)과 사굴산문의 탄연(1070-1159), 또 이자현(1061-1125)이 청평산에 들어가 보현원을 문수원이라 고치고 선법을 선양한 사실 등을 미루어 보아 차츰 선종세력이 부상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허흥식,1982; 최병헌,1983; 김 상영, 1988)

고려 중기에 선사상이 부흥하고 또한 서서히 독립된 교단으로서 기반을 재정비하기에 이르렀으나, 당시 사회구조의 보수적인 추세에 함몰될 수 밖에 없었다. 단만 당시 거사들의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점은 무신 난 이후 수선사 계통의 선종이 부각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한 것임에는 틀림없다.(조명제,1988)

사회변동과 관련한 신앙결사는 사회운동의 성격을 지니는 경우를 말한다. 운동의 차원에서 평가할 수 있는 신앙결사의 예는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회변동과 함께 전개된 지눌(1158-1210)의 정혜결사(뒤에 수선사로 사액)와 요세(1163-1245)의 백련결사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 들 신앙결사의 성격은 불교계 내부의 자각 반성운동일뿐만 아니라 불교개혁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채상식 1990). 다시 말하면 이들 결사가 출가자 중심의 수행단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세속으로 다시 돌아와 서민대중으로 회향함으로써 당시 사회를 정화해 가려고 한 점에서 신불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최병헌,1996)



2.연구동향과 성과



1)수선사의 성립과 전개



수선사는 지눌이 명종12년(1182)정월에 개경의 보제사에서 개최한 담선법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동지 10여 명과 함께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결사를 맺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출발했다.(진선규 1984; 최병헌, 1987; 허흥식, 1994). 그 뒤 지눌은 창평 청원사, 하가산 보문사, 팔공산 거조사居祖寺, 지리산 상무주암 등지를 유력하면서 수선修禪에 힘썼는데 , 특히 거조사居祖寺에서는 <<정혜결사문>>을 반포함으로써(명종 20,1190) 정혜결사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신종 3년(1200)에는 송광산 길상사로 그 근거지를 옮겼다. 지눌의 수선사는 당시 불교계의 여러 모순과 폐단을 자각하고 이에 대해 단순한 비판과 반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수선사는 명종26년(1196) 최충헌이 등장한 이후 그 시기 무신세력의 관심 대상이 되었으나 불교 교단의 중심세력으로 주목을 받으며 크게 성장한 것은 고종 6년(1219) 최우가 등장한 뒤라고 할 수 있다(민현구, 1973; 김당택, 1981)

최충헌은 지눌의 정혜결사에 관심을 가져 수선사라고 사액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선종 출신인 지겸(1145-1229)과 깊이 밀착하여 그를 중심으로 교단체제를 개편하려 하였다.

최우는 수선사 계통과 가장 밀착하여 두 아들을 삭발케 하여 혜심(1178-1234)의 문하에 두기도 하였다. 고종 19년(1232) 강화도 천도 이후 선원사를 건립하고 수선사의 별원으로 삼았다.

이러한 수선사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수선사가 기존의 선문을 통합하고 최씨정권의 비호에 따라서 조계종으로 성립 발전하였다는 단선적인 관점으로 일관하였다( 김 영수,1938; 민현구, 1973)

그러나 두 가지 사상사적인 측면 곧 12세기 이래 고려 사상계에서 유행하던 간화선을 답습 계승한 수준을 넘어 심화 정교 종합 발전시킨 측면과 당시 대다수 민중들의 신앙인 공덕과 정토신앙을 끌어안는 불교관을 표방한 측면을 살펴야 수선사의 결사취지를 사상捨象하지 않는다. 이 두 측면을 통해 불교 교단 전체를 통괄하는 위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채상식,1990) 수선사가 당시 기존의 여타 종파에 견주어 폭넓은 지지기반을 확보하였기에 광범한 지지기반을 확보하려는 최우정권이 그 세력기반으로 지눌과 그를 계승한 혜심의 수선사를 택했던 것이다.

수선사에 대한 불교학 철학 방면의 연구(이 종익,1972; 길 희성,1982)는 지눌의 사상체계에 대한 연구로 일관되어 왔으며, 그 결과 이들에 의해 간화경절문을 궁극으로 하는 지눌의 철학체계에 대한 부분이 많이 밝혀졌다. 지눌의 불교사상은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로 일관된 선법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선법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 경절문 등의 3문에 차례로 입각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박영제,2007)

한편 지눌을 계승한 수선사2세인 혜심에 대해서는 그의 사상적 비중이 대단히 큼에도 기초적인 정리에 머물고 있는 형편이다(진선규,1986; 권기종,2004) 이는 그의 사상체계를 집약하고 있는 <<선문염송>>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이해의 부족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된다. 혜심은 선사상만을 견지하였다기보다 넓은 의미에서 실천공덕신앙 곧 정토신앙과 밀교적인 요소도 포용하는 탄력성을 가진 당대 최고의 사상가였다.

아울려 지눌과 혜심이 간화선을 크게 정착시킨 대혜의 어록으로 깨달음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대혜의 이미족 침략에 대응하는 국가의식 민족의식에도 영향을 받아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대대적인 몽골의 공세에 맞서 국사의식 민족의식을 표방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조명제, 2001)



2)백련결사의 전개



백련사는 천태종 승려인 요세에 의해 개창된 신앙결사이다. 신종 원년(1198)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에서 개최한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그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것이 신앙결사에 뜻을 둔 계기가 되었다(고익진, 1979; 채상식,1979)

요세는 신종 원년 가을에 동지 10여명과 여러 지역을 유력하다가 영동산 장연사에서 처음으로 백련결사를 맺는다. 이렇게 결사를 시작한 요세는 지눌의 권유에 따라 수선修禪을 체험하기도 하였으나 천태교관으로 확고한 사상적인 전환을 하였다(고익진,1983)

요세는 천태교관을 이루기 위해 특히 실천행을 강조했는데, 그 방향을 修懺과 彌陀淨土로 인식하고 그 이론적 근거를 <<법화경>>에 바탕을 둔 천태지자天台智者의 <<摩訶止觀>>,<<법화삼매참의懺儀>>와 사명지례四明知禮(960-1028)의 <<관무량수경鈔>>에서 찾았다. 이를 바탕으로 1216년 강진 만덕산으로 주거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백련결사를 결행하였다.

요세의 백련사는 고종 3년(1216)에 개창되었으나 고종 19년(1232) 보현도량을 개설함으로써 그 성격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요세가 개창한 백련사 결사의 사상적인 골격은 법화사상에서 찾을 수 있으며, 대체로 보현도량 개창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지눌 계통의 수선사를 통해서 간화선의 경향에도 관심을 가진 바 있으나 천태선이 주를 이루었으며, 개창 뒤에는 특히 염불정토관과 참회행이 강조되었음을 특징지을 수 있다.

요세를 계승한 그의 문도들은 대표적인 인물로서 天因(1205-1248),천책天頙(1206-?) 등을 들 수 있다.

백련사는 초기 지방의 토호층과 이들을 지지하던 일반 백성들을 주요 단월檀越( 중에게 또는 절에 물건(物件)을 베풀어주는 사람.시주施主)로 하였으나,1220년대에는 주로 인근 지역 지방관의 배려에 힘입어 유지되었다. 그 뒤 1230-1240년대에는 최우를 중심으로 하여 그와 밀착된 중앙관직자와 많은 문신관료층이 백련사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백련사에서 고종19년(1232) 4월 8일에 보현도량을 설치한 것은 분명 대몽항전과 관련된 대응 조처였으며 이는 최우가 같은 해 6월에 단행한 강화도 천도와도 연결되는 조치로 보인다.



3) 양대結社의 역사성



13세기 전호 불교계의 양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신앙결사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그 주도세력과 단월의 출신성분이 그 이전과는 달리 대부분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독서층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불교계의 변화는 당시 사회의 권력구조의 개편 및 사회경제구조의 변화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결사운동이 남기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는 사회계층의 측면에서 볼 때 지방토호층과 독서층들이 불교계의 제반 모순을 자각 비판하고 개혁을 주도했다는 사실과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그 이념이 수행과 교화라는 두 방향으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대장경 조성의 사회적 사상적 기반이 신앙결사와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장경 補遺판에 많은 선적이 포함된 것은 수선사가 13세기 중반에 간행한 선적과도 무관하지 않으며(채상식,1991; 조명제,2004), 아울러 백련사 계통의 문헌이 보유판에 포함되었음을 말해주는 자료가 출현한 것은 특기할 만 하다..

다시 말해 판목은 없어졌으나 천태종의 기본서라 할 수 있는 ‘삼대부’를 요세가 ‘절요’한 것을 입증할 수 있는 판본이 발견되고 이 자료가 보유판에 포함된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남권희,2002)

한편 대장경 판각에 백련사 승려들이 직접 각수로 참여한 사례를 밝힌 연구(최영호 1997,2008)는 대장경 조성의 주체를 이해하는 데 진일보한 것이라 할 만하다. 아울러 대장경에 입장된 <<금강경>>의 각수를 분석하여 수선사가 대장경 판각에 직접 참여한 사례를 밝힌 연구(최연주,2005)도 눈길을 끈다. 특히 수선사가 <<금강경>>을 중시하였음을 더욱 보강한 성과로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히후 고려사회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불교의 사회적 기능은 축소되고 만다. 이는 일연 출현 이후 부각된 가지산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백련사 계통을 계승한 운묵雲黙의 경우에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신앙결사 단계에서 구축한 사회적 기반, 즉 소수의 문벌귀족으로부터 지방사회의 향리층, 독서층이 획득한 사상계의 주도권을 주자성리학이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자성리학이 고려 말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기반은 이미 무신난 이후의 불교계가 마련한 셈이다. 따라서 고려 말의 불교가 시대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단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성리학을 기치로 내세운 신진 사대부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불교는 사상계의 주도적인 위치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참고문헌



1)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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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 개관



1.한기두, 「정혜결사의 본질과 그 변천」, 보조사상 1권 pp.25~49, 보조사상연구원 |1987년



결사적 방법으로 선의 진경에 들게 하는 운동을 일으키게 한 정혜결사의 역사적 의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39년 7월 김영수, 1938, <조계선종에 취하야>가 발표된 이후임.



이능화(조선불교통사,하,p.336.1919년 3월)에 의하면 지눌이 단경을 통해 깨닫고 나서 遠師조계라고 부르며 송광산 길상사에 내려가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길상사를 수선사로 고친 때부터 조계종이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영수(김영수, 1938, <조계선종에 취하야>, <<진단학보>. 9.P.P 145~174)에 의하면 이미 그 이전인 신라 구산선문 당시부터 이미 조계종이라고 불러온 사실을 제시하면서 이능화설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따라서 지눌은 수선사의 결사를 했으나 한갓 사굴산문의 중흥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전의 역사학계의 사상적 기조였으나 1970년대에 이르러 결사운동이 주는 새로운 의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하 이 논문에서 소개된 논문들이다.



민현구, 1973,10 <월남사지 진각국사비의 음기에 대한 일고찰-고려무신정권과 조계종>, <<진단학보>> 36.



이종익, 1973,6 「고려보조국사의 연구」 (진단학보)

한기두, 1975,10 「고려불교의 결사운동」 (숭산화갑논문)

허흥식, 1981,1 「13세기 고려불교계의 새로운 경향」 (한우근劤박사 정년기념논총)

김당택, 1981,12 「고려최씨무인정권과 수선사」(역사학 연구)

채상식, 1984,4 「고려후기 불교사의 전개양상과 그 경향」 1984.4 (역사교육)

진성규, 1984 「고려후기 수선사의 결사운동」 (한국학보)

유영숙, 1986,12 「최씨무신정권과 조계종」 (백산학보)

이지관, 1984,10 「지눌의 정혜결사와 그 승계」(한국선사상연구)

채상식, 1987,8 「고려후기 불교사 연구」(서울대 학위논문)



2.호불 정영호 교수 고희 기념논총 : 고려시대 불교신앙 결사에 대한 인식과 그 성격 -『동문선』 소재 신앙결사 기록을 중심으로-

정제규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21권0호 (2004), pp.623-650



『東文選』을 통해 고려시대의 재가불교신자들이 신앙결사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신앙결사의 바램은 淨土往生에 있었다. 고려 사회에서의 신앙결사에는 淨土往生이라는 현실적인 신앙의 측면과 修行이라는 교리에 근본한 태도가 동시에 존재하였다. 이같은 성격 때문에 많은 불교신자들이 신앙결사에 참여하였고 폭넓게 확산되었다. 또한 적극적으로 신앙결사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또한 재가불교신자들이 추구했던 것은 개인의 복덕을 구하기 위한 `求福`적 성격 외에도 `菩薩道의 修行`에 있었다. 이같은 현실적인 신앙의 바램과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은 공존하였다. 한 가지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은 주의하여야 한다. 고려사회에서의 신앙결사가 갖는 성격이 왜곡되어 이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3. 結社의 정의에 대한 재검토, 김호성 /동국대 교수



결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불교교단의 문제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서 직접 그 상황 속에 참여하여 개혁하고자하는 대신, 그 상황으로부터 避隱하여 먼저 스스로 수행함으로써 장차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



참고로, 권기종은 「정혜결사의 현대적 의의」라는 글에서 ‘결사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한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공동적 수행’이라고 하였다.



「결사의 근대적 전개양상-정혜결사의 계승을 중심으로」,

『보조사상』제집 서울: 보조사상연구원 1995)

‘자성(自省)과 쇄신(刷新) 결사’에 대한 고찰

─ 성립가능성과 수행을 중심으로 ─



4.정혜결사의 후대의 계승과 영향에 관해서는 이하의 논문들이 있다.



보경, 「지눌 정혜결사의 근현대적 계승 고찰」, 발행년 2011.08, 普照思想 펴냄

송광사 중심의 계승 즉 근현대의 선지식인 효봉과 구산을 통해 실천된 것을 연구한 논문.



김방룡, 「여말선초 보조 선사상의 영향」, 보조사상 19집, 2003.

황인규, 「목우자 지눌의 선풍과 고려후기 조선초 불교계의 고승들」, 보조사상 19

집, 2003.

황인규, 「조선전기 불교계 고승과 목우자 선풍」, 보조사상 21집, 2004.

이창구, 「조선중기 보조선의 영향」, 보조사상 21집, 2004.

김용태, 「부휴계의 계파인식과 보조유풍」, 보조사상 25집, 2006.

김방룡, 「조선 후기 보조선의 영향」, 보조사상 25집 ,2006.

이덕진, 「근·현대불교에 끼친 보조사상의 영향」, 보조사상 29집, 2007.

김경집, 「한국 근·현대 불교의 보조영향」, 보조사상 27집, 2007.



정혜결사의 철학적인 면에 관한 석사논문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김방룡, 「지눌의 정혜결사 연구」, 전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4

인 경, 「보조지눌의 정혜관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4.



5.권기종, 「정혜결사의 현대적 의의」 보조사상 56권 pp.185~204, 보조사상연구원 |1992년

지눌의 「권수정혜결사문」을 인용하여 그 현대적 의의를 찾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 처음 인용하는 부분은 아래와 같다.

‘우리들이 날마다 하는 소행을 돌이켜보면 어떤가. 불법을 빙자하여 나와 남을 구별하여 利養의 길에서 허덕이고 풍진 속의 일에 골몰하여 도덕은 닦지 않고 의식만을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아아! 3계를 떠나려하면서 속세를 벗어난 수행이 업고 한갓 사내의 몸이 되었을 뿐이요, 장부의 뜻은 없어 위로는 도를 닦는데 어긋나고 밑으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중간으로는 四恩을 져버렸으니, 진실로 부끄럽다.然返觀我輩 朝暮所行之迹 則憑依佛法 裝飾我人 區區於利養之途 汨沒於風塵之際 道德未修 衣食斯費 雖復出家 何德之有 噫夫欲離三界 而未有絶塵之行 徒爲男子之身 而無丈夫之志 上乖弘道 下闕利生 中負四恩 誠以爲恥 以是長歎 其來久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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