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8일 화요일

문화인물 11월 대각국사 의천 (大覺國師 義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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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 11월 대각국사 의천 (大覺國師 義天)



1. 1055 – 1101

2. 고려시대 천태종의 개조(開祖)

3. 선(善)과 교(敎)의 수행을 함께 추구

4.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불서를 모아

5. 속장경(續藏經) 간행

6. 주요저서 : <대각국사문집>,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등











글쓴이 : 김상현

약력



1947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남

경상대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문학박사

단국대학교 교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동국대 신라문화 연구소 소장 역임

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전공 한국불교사)





저서

신라의 사상과 문화, 원효연구,

신라화엄사상사연구, 역사로 읽는 원효,

한국불교사 산책, 한국의 차시 등







11월의 문화인물 : 의천





1. 의천은 누구인가

2. 의천의 생애

3. 의천의 전등

4. 의천의 학문과 사상

5. 의천의 업적

6. 의천의 역사적 위상

7. 대각국사 의천 연보





1. 의천은 누구인가

세속의 부귀와 영화를 버리기란 쉽지 않고,설사 그것을 버리고 출가한 이라도 진정으로 구도자의 길을 가기란 어렵다. 그런데 왕자로 태어나 11세에 출가하고 47세로 입적할 때까지,오직 구법과 전등을 발원하며 끊임없는 수행과 학문과 강학으로 일생을 살았던 대각국사 의천,그는 참다운 구도자였다. 그는 구법을 위해서 밀항도 주저하지 않았고,학문을 위해서는 침식을 잊고 촌음을 아꼈다. 그리하여 그는 고려의 대표적 고승이면서 탁월한 불교학자로 평가 받는다. 그는 교관병수를 주장하며 불교개혁을 주도하기도 했고,주전론을 써서 용전의 편리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교장을 간행하고,천태종을 창설하기도했으며,국제 교류를 활발하게 추진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과 입적 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불교전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국 사가 이룩했던 수행과 학문은 끊임없는 정진으로 도달한 것일 뿐,그의 왕자 신분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권력이나 돈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 중 의 하나가 수행과 학문이기 때문이다.



국사의 행적은 그의 묘지와 영통사비,그리고 선봉사비 등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전한다. 이제 이들 기록을 중심으로 그의 일생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2.의천의 생애

대각국사는 아버지 문종과 어머니 인예태후 이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1055년 태어났다. 이름은 후,자는 의천,대각국사는 그의 시호다. 국사 32세 때에 송의 철종이 즉위 하메 그의 이름 후를 피하여 이때부터 이름 대신에 자를 사용했다.

부왕은 어느 날 네 왕자를 불러놓고 “누가 능히 출가하여 복전의 이익을 짓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국사가 일어나 출가의 뜻을 밝히자 부왕은 허락하고 1065년(문종 19) 5월 14일에 난원을 내전으로 불러서 머리를 깎게 하고, 스승을 따라 개경의 영통사에서 살게 하였다. 당시 왕사였던 난원은 화엄종에 속한 66세의 노승이었다. 국사 는 이 해 10월에 불일사 계단에서 계를 받았다. 스승 난원은 국사가 출가한 그 다음해에 입적했다. 국사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학문을 쉬지 않았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13세에 우세라는 호를 하사하고 승통직을 내렸다. 19세에 세자를 대신해서 교장의 수집을 발원하는 글을 지었다. 아마도 교장수집의 원을 세우고 제종장소(諸宗 章疏)의 수집에 착수하게 된 것도 국사의 청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국사가 20세 이전에 이미 교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수집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불교학에 대한 남다른 안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다, 23세 때부터 강의를 했는데,이로부터 입적할 때까지 24년 동안 한 번도 패한적이 없었다.

국사는 서른 살이 되던 선종 1년 요신 정월에 내전에 들어가 송나라로 가서 구법 할 뜻을 간곡히 아뢰었다. 둘째 형인 선종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했지만 모두 반대했다. 이에 국사는 중신들 앞에서 현장의 서 역 구법과 의상의 입당구법의 예를 들면서 눈물로 호소했지만,왕자의 입송이 요나라를 자극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염려하는 중신들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어떤 장애도 국사구도의 열정을 낌을 수는 없었다. 이듬해 4월 8일 밤에 국사는 왕과 태후에게 편지만 남긴 채 제자 수개등과 함께 정주에서 상선을 타고 송나라로 향했다. 반계를 듣기 위해 몸을 던지는 자세로 밀항을 감행했던 것이다. 국사가 송나라로 떠났다는 소식에 접한 국왕은 조정의 관료와 국사의 제자 낙진 ‘ 혜선 ‘ 도린 등을 보내어 뒤따르게 했다. 국사는 5월초에 판교진에 도착했고,7월에는 송의 서울 변경에 이르렀다. 송제 철종은 국사를 따뜻이 맞아주었고, 여러 가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국사는 송에 체류하던 14개월의 짧은 기간에 변경과 항주를 오가면서 고 승 50여 명을 만나 불법을 묻거나 교류했다. 국사가 직접 만났거나 서신으로 교유했던 송나라의 승려 중에 소속 종파의 확인이 가능한 경우만 을 분류해 보면,정원,유성 등 화엄종 13명,종간 등 천태종 8명, 선종의 종본, 요원, 회련 등 5명,율종의 원조, 택기 등 3명,그리고 법상종 2명, 서천범학2명, 종파 미상8명 등이었다.

국사는 변경의 각엄사에서 화엄종의 고승 유성법사를 제자의 예로 만났고,상국사의 종본선사를 알현하기도 했다. 종본은 이때 국사를 찬양 하여 다음의 게송을 설하기도 했다.



이 세상 그 누가 만리의 높은 파도 타고,

불법 위해 몸 잊고 선재를 본받았던가?

생각건대 염부제애서는 참으로 희유한 일,

마치 우담발화꽃이 불 속에서 핀 것 같네.



변경의 흥국사에는 인도에서 온 천길상이 있었는데,국사는 이 절에 약 한 달 가까이 머물며 인도불교에 대해서 배웠다. 그리고 국 사는 항주로 향했는데, 주객원외랑 양걸이 배행했다. 도중에 금산을 지나면서 요원선사를 방문하기도 했다. 국사는 항주에서 정원,종간, 원조를 만났다. 정원은 당시에 항주 상부사의 주지로 있었는데,국사는 아침저녁으로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약 반년을 이곳에서 보냈고,마침내 정원으로부터 화엄 교를 전수받았다. 이듬해에 정원은 혜인사로 옮겼고,이 절을 화엄종의 중흥 도량으로 발전시켰다. 이곳에 화엄교장을 설 치하고 교장 7,500여 권을 비치했는데, 그 경비를 국사가 지원 했다. 훗날 이 절은 국사와의 인연 때문에 고려사로 이름을 바꾸어 의천의 공덕을 기렸다. 국사가 천태종의 종간을 만난 것은 항주의 상천축사였다. 종간은 국사에게 수로를 주면서 홍법전 등을 부촉했다. 그가 국사에게 준 시에는 “훗날 해 동에서 두루 펴는 곳마다 지혜의 등불 천만으로 무궁토록 비추소서”라 고 했고,또 귀국 후에는 국사의 천태교법의 홍포를 기뻐하는 편지를 보 내오기도 했다.국사가 송나라에서 교유한 여러 고승중에서도 가장 의기투합했던 인물은 화엄종의 정원과 천태종의 종간이었고,국사가 이들로부터 받은 영향은 컸다. 아무튼,14개월 동안 송나라에서의 구법을 통 해 국사는 불교에 대해 국제적인 안목과 종합적인 시각을 키울 수 있었고,3,000여 권의 불전을 구할 수 있었으며,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여러 화엄전적을 항주의 혜인사에 전하여 중국화엄교학의 재흥을 돕기도 했다.

국사는 송나라의 구법을 마치고 귀국한 바로 그 해인 1084년에 흥왕사의 주지를 맡았다. 문종의 원찰이었던 흥왕사는 2,800칸의 건 물에 1,000명 대중이 상주하던 고려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 국사는 곧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해서 교장의 간행에 착수했다. 선종 6년 10월에는 국청사 건립에 착수했는데,이는 곧 천태종 개창을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다음 해에는「신편제종교장총록」을 간행하고,또 그 다음해 인선종8년에는 남쪽으로내려가 일서 4,000여 권을 구하기도 했다. 국사 38세 때인 선종 9년 모후인 인예태후가 돌아가고,다음해 1094년에는 선종이 돌아감으로 해서 많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아마도 국사의 국청사 창 건과 이를 토대로 한 천태종 개창을 반대한 법상종 세력의 강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 같다. 국사는 해인사로 물러났다가 다음 해 10월 숙 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흥왕사에 주석했다. 43세 때인 숙종 2년에 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했다. 이로써 국사는 천태종 개창의 오랜 염원을 이룩했던 것이다.

숙종 6년(산아) 8월 국사의 병이 위독하메 왕이 친히 위문했다. 국사 는 셋째 형인 숙종에게 “제가 원하는 것은 정도(正道)의 중흥이오나 병이 저의 뜻을 빼앗아갔습니다. 바라옵건데,지성으로 불교를 외호하여 여래의 유교에 부흥토록 하시면,이는 죽어도 썩지 않는 불멸 의 공덕이 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10월 5일에 국사는 입적했다. 47세의 아까운 나이로. 올해로 그가 돌아가신 지 꼭 900년이 된다.





3,의천의 전등

지극한 효성은 국사의 천성이었다. 그는 비록 출가한 승려였지만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메 게을리 하지 않았고,돌아가신 뒤에는 정성을 다하여 천도의 공덕을 닦았으며,기일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그 는 불교나 유교의 교리가 다르지만 효도를 숭상하는 점에서는 서로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우란분경』을 강하면서 다 음과 같이 말했다.



오형이 삼천 가지지만,불효만큼 큰 죄가 없고, 육도에 돌아가는 것이 팔만이지만 효도만큼 큰 복이 없다. 불교의 오시와 유전의 육경은 모두 대소를 휩싸고 존비를 일관하는 것이니, 비록 베푼 가르침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효도를 숭상하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 범망보살대계에서 이르기를 복모와 사승 과 삼보에 효순하고 지극한 도법에 효순해야 한다. 효도는 곧 계 율이라고 하셨다. 나아가서는 십중계와 사십탈경계를 말씀 하셨으니,이것이 곧 칭성대계로서 효도의 극치인 것이다.



이처럼 국사가『우란분경』을 강의하면서 불교의 효를 강조한 것도 자 신의 효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도를 넓히는 일은 사람에 의한다고 생각한 국사는 사제간의 도를 매우 강조했다. 그는 “스승은 스승답지 못하고 제자도 제자답지 못하다”고 탄 식하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 입문한 제자 덕칭에게 준 편지 에서 사제간의 도리에 대해서 강조하기도 했다. 다음이 그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다만 스승과 제자라는 이름만 알 뿐,스승과 제자의 참 다윤 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가 가끔 있다. 진실로 스승과 제자가 그 도로 하지 않으면 불조의 가르침이 어디에 의지하여 행해지며, 뒷날 스승이 될 자가 어디에 의지하여 존립할 것인가? 도가 행하지 못함이 실로 여기에 원인이 있다.



이 글에서는 스승이 지켜야 할 도리와 제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함께 거론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국사는 불법을 널리 선양하고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생각했기에 강학에 힘을 쏟기도 했다. 강의를 시작한23세 이래로 입적할 때까지 24년을 한결같이 강선에 힘써서 한번도 폐한 적이 없었다. 그는『화엄경』,「원각경』,『유교경」,「우란분경』,『법화현의』,「천태지관」,「금강경해동소』,『사분율행사초』 등을 흥왕사,국청사,해인사 등지 에서 강의했다.

국사가 천태종을 개창하자 국사의 문하로 천여 명이 모였다. 이들 수 많은 제자 중에서도 국사의 화엄교학을 계승한 제자로는 낙진이 징엄,도린, 계응, 혜소 등이 있었다. 낙진은 입송한 국사를 뒤따라가서 수행했고,국 사의「원종문류」편찬을 돕기도 했다. 숙종의 제4왕자인 징엄은 국사의 조카이기도 했는데,학문에 정진했고,훗날 흥왕사에서 종풍을 크게 떨 쳤다. 계응은 국사의 적사로서 화엄교학을 크게 펴다가 만년에 태백산으 로 들어가 각 화사를 짓고 화엄학을 펼쳤다. 혜소는 항상 국사를 수행했는데,국사 입적 후에는 행록 10권을 지었다. 그리고 국사의 천태 교학 문하에는 덕린,익종 ‘ 경란 ‘ 연묘 ‘ 순선 ‘ 교웅 ‘ 유청 ‘ 지선 등이 배출되어 종풍을 떨쳤다. 교웅은 스승 익종을 따라서 국청사로 옮겨 국사의 강하에서 천태교학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숙종 6년 처음으로 실시한 천태종선에서 가장 좋은 성적으로 뽑혔고,뒤에 국청사의 강사 가 되어 천태경론을 환하게 밝히고 그 법을 학도들에게 전해중으로써 천태종풍을 크게 떨쳤다.



4. 의천의 학문과 사상



1) 학문과 저술

의천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했다. 촌음을 아껴서 많은 전적을 탐색하고,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만큼 학구적이었다.



어쩌다 머리털 이다지도 희었는가

학업의 수고로움 쌓이고 또 쌓인 탓이지



라고 고백할 정도로 정진하던 학승이었다. 누적된 과로는 건강을 해서 “나는 심로의 병이 있는데, 근일에는 점차로 더해서 경서를 보고 읽을 때 매양 심동을 느껴 학업이 황폐하게 되었다.” 고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병을 얻어 입적하기 직전까지도 독서를 쉬지 않았다. 김부식이 비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진정 의천은 학문을 쉬지 않는 학자였다.

국사가 당나라 배휴의 발보리 심문을 감동으로 읽고,계주의 면학 1편을 <원종문류>에 수록했던 것도 그의 남다른 학구열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세월의 무상함을 강조 하면서 부지런히 수행에 힘 쓸 것을 다음과 같이 당부하기도 하였다.



불법을 만나기 어렵고 좋은 시절도 만나기 어렵다. 오늘이 지나가면 목숨도 보존하기 어려움이 줄어드는 물 속의 고기와 갈거늘, 여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경에서 이르기를 “꽃을 꺾어 햇볕에 두면 얼마 나 고울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는가? 몸에는 옷을 걸치고 입으로는 음식을 먹지만,어찌 쉽게 소화되랴? 바라건대,인연이 있어서 법당을 가득 메운 대중은 다같이 일승에 뜻을 두고 함께 만행을 닦아 모든 부처님 회상에서 다 시 서로 만나는 것이 곧 소원이다.



이는 국사가 [유교경]의 강의를 끝내면서 대중에게 절절히 당부한 내용이다. 산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듯 세월은 쏜살같이 흐르니 어찌 촌음을 아끼지 않겠는가? 국사는 송나라 정원법사에게 불법 배우 기를 청하면서 그 표문에서 말했다. "신은 대궐의 영화를 사양하고 불법 에 뜻을 두었지만,깊은 이치 탐구하기 어려움을 탄식하고 정법 쇠해 감을 슬퍼하면서 촌음을 아껴 많은 전적을 탐색했습니다.” 이로써 국사가 촌음을 아끼며 학문에 몰두한 목적이 정법의 탐구와 그 보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 행자 안현에게 준 국사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서 주목된다.



널리 배우고 다시 핵심을 요약하여 천년 뒤의 사람들로 하여금 해와 달과 더불어 높음을 겨루고,위신과 함께 오묘함을 다투거늘,또 어찌 학자가 부질없이 억지로 천착하여 후학들이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을 적정하겠는가.

이 문장은 앞부분이 떨어지고 없어서 정확하지는 못하지만,학자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후학들이 자신의 견해를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해와 달과 함께 높음을 겨루고,귀신과 더불어 오묘함을 다투며,천년 뒤에 올 눈 밝은 사람과 대 화하는 것,그것이 곧 학자의 진정한 자세라는 내용이다. 결국 학자의 목적은 진실의 탐구에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국사는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 중에 그 진리를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무리 들’을 보면서 슬퍼했다. 경법심은 진정한 구도자의 마음이며 참 다운 학자의 마음가짐이다.

국사의 불교 연구의 폭은 대단히 넓었다. 현수교관으로부터 돈교와 점교, 대 ‘ 소승의 경률론과 그리고 장소에 이르기까지 탐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당시의 불학 이었던 계율 ‘ 법상 ‘ 열반 ‘ 법성 ‘ 원융 ‘ 선적의 6종을 아울러 연구했다. 그는 스스로 “자은 ‘ 현수의 종지와 천태,남산의 종지에 이르러 외람되이 향로와 불자를 전해 받았다”고 했었다.

국사는 틈틈이 외전에도 관심을 가져 유학,역사,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섭렵했다. 그 스스로 “삼장에 마음을 쏟는 이외에 행 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경사를 섭렵하여 옛 사람의 어질고 불초함을 관찰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실제로 주전론에서 많은 역사적 사례를 들었고, 김부식을 만났을 때『주역」과 노장학의 중요한 대 목들을 시험 삼아 물어볼 정도로 외전에 밝았던 것이다.

국사는 종래의 교학 연구가 정묘하지도 못하고 넓지도 못하며 억설이 많다고 비판하기도 했고,“지금은 말세라 대충대충 배우는 자가 많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겸하여 배우지 못한 과실로 해서 사람들의 웃음 거리가 되는 경우’를 지적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혀야 함을 강조했고, “근세에 우리 종에서 이단을 좋아하는 무리들은 근본을 버리고 끝을 좇 아서 억설이 분분함에 조사의 깊은뜻이 막혀 어렵게 됨이 열에 일곱여 덞이나 된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도송 구법여행과 외국 고승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국 제적인 안목을 넓혔다. 특히 수천 권의 장소를 열람함으로써 그의 교학 이해에 폭과 깊이를 더했다. 국사는 신라 불교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밝았는데, 자장, 원측,보덕,원효,의상, 경흥, 현일,신웅,태현, 연기,의적 등의 장소 117부를 간행했고 또한 공부했다. 국사는 다음과 같은 저서를 남겼다.

①「신편제종교장총록』3권.

②『원종문류)』22권.

③「석원사림』250권,191〜195권

④『대각국사문집』23권 및 『대각국사외집 』13권,.

⑤『간정성유식론단과』3권,.

「신편제종교장총록』은 20여년 의천이 수집한 장소의 목록을 작 성한 것으로 목록사상 귀중한 문헌이다.『원종문류」는 화엄종과 관련된 여러 문헌을 모아서 요긴한 것만을 정선하여 종류별로 분류해서 편찬한 것이었다. 이 책의 편찬을 위해서 화엄학자들을 모아서 의논하기도 했고, 편찬을 사양하는 제자 도린에게 시를 지어서 권하기도 했다.

이로써 이 책의 편찬에는 제자들의 도움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석원사림』은 장소를 제외한 고금의 불교 관계 문장중에서 교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모아서 편찬한 것이다. 국사가 이를 완성하지 못한 채 돌 아가자 문인 각순 등이 계승하여 편찬했다. 이 때문에 취사선택상 의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 현존하는『석원사림』의 잔편에는 고승의 비 문이 수록되기도 했는데,우리 나라에서 금석문을 처음으로 수록한 예다. 해인사에 머물고 있던 1094년에 국사는「간정성유식론단과」3권을 저술했다. 이 책은 난삽한 유식 교리의 대의를 간명하게 서술 한 것이었다. 국사의 저서 중에『계학권선면학』이 있다 고하는경우도 있다. 그러나『계학권선』및「면학』2편은 원래「원종문류』권21에 수록되어 있던 것으로 지원의 글이다. 국사의 저서는 자료를 모아서 편집한 경우가 많은데,이 점을 교장의 간행과 아울러 생각하면,그의 노력이 교학 자료의 집대성으로 향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작업을 제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진행시켰다. 이러한 것들은 국사의 교학이 갖는 한 특징이기도 하다.



2) 의천의 사상

국사의 불교사상은 교관병수로 요약될 수 있다. 국사는 학불자를 학교지자와 습선지인으로 구분한 뒤에 “학불자는 흔히 안을 버리고 밖을 구하며,습선인은 인연을 잊고 내심 밝히기를 좋아하는데,이는다 치우친 집착이며 함께 두 극 단에 막힌 것”이라고 하여,교와 선을 같이 공부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우선 교를 떠나서 선을 설하는 설선자에게는 겸학이 필요한 이 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세에 불법을 배우는 이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별안간 깨달았다고 하 여 정상적 과정이며 방편인 권교와 소승을 업신여기면서 성상을 말하는데 이르러서는 자주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겸하여 배우지 못한데 말미암은과실이다.



이 때문에 국사는 구이지학으로 한 법을 깨달았다고 하며 스스로 만족하면서 삼장 십이분교를 비난하는 하근기의 학인들에게 능가경과 기신론등의 경론 을 배우도록 구체적으로 권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국사가 교학자를 향해서는 관문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가 말 하기를,"『화엄경」을 전한다고 하면서도 관문을 배우지 않는 이는 비록 강주라고 하여도 나는 믿지 않는다”라고 했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국사는 교관겸수를 주장했다. 국사는 송나라의 정원으로부터 교관을 배운 바 있는데,그때 스승 정원은 관도 배우고 경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서 국사는 다음과 같이 술회 하였다.



스승은 관도 배우지 않을 수 없고 경도 배우지 않을 수 없다 고 하셨다. 내가 교관에 마음을 다 쓰는 것은 이 말씀을 명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량이 "마음을 비춰 보지 않고 헛되이 성령을 저버린다고 했던 것도 역시 이러한 뜻이다.



이처럼 국사는 정원으로부터 교관병수의 중요성을 배워서 이를 명심 했고, 또한 제자들에게도 이를 가르쳤던 것이다. 그리고 국사는 원효가 성상을 융화하여 밝혔다고 보고,학인들의 성상겸학을 권하면서 성종과 상종의 추요인「기신론』과「유식론」을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국사는 교종인 화엄종과 선종인 조계종 모두에서 발견되는 선교 어느 한 쪽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선교의 통합을 지향했다. 그는 화엄종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관병수를 주장하고,선교일치 사상으로 선종을 포섭하려 했던 것이다. 국사는 당시 화엄종의 병폐를 지적하여 성교를 밝은 거울로 삼아 제 마음을 비춰보지 못 하고 일생 동안 구구하게 남의 보화만 세고 있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이 러한 모순의 극복을 위해서 그는 교관병수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사는 선종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교외별전의 심법을 파척하기 위하여 지은 계주의 별전심법의를 그의「원종문류』에 수록하고서 계주의 견해에 공감하기도 하고, 요의 도종이 혜능의『육조단경」과지거의『보림전』을 불태워버리게 했던 조치에 대해서도 공감을 표했을 정도다. 국사의 선교통합노력의 배 경에는 종밀의『원각경소」의 영향이 많다. 국사는「원각경』을 매우 중시했다. 숙종4년에 국사는 흥원사에 원각경 법회를 개설하고 학일을 부강으로 초청했으나,학일이 사양하기를 선 과 강이 교람하는 일은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만 법석에 참석 하여 청강만 한 일이 있다. 국사는 종밀의 소에 의거하여『원각경』을 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대개 법에는 말이나 형상이 없지만 그렇다고 말이나 형상을 떠난 것도 아니다. 만약 말이나 형상을 떠나면 의혹에 빠지고,말이나 형상에 집착 하면 진실을 모르게 될 것이다. 다만 세상에는 완전한 재능이 없고, 사람은 아름다움을 다 갖추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교를 배우는 이는 내학을 버리고 문자와 경계를 따라 밖으로 구하는 이가 많고,선정을 익히는 사람은 인연을 버리고 안으로 밝히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치우친 고집이며 두 극단에 머무는 것으로 마치 토끼뿔의 길고 짧음 울 다투고,허공꽃의 짙고 옅음을 다투는 것과 같다. 그런대 마음은 피 차에 공정하고,고금에 독보하며,선정과 지혜를 모두 갖추고 자기와 남 을 아율러 이롭게 하며, 공을 보면서도 만행이 용솟음치고, 유에 관계하면서도 일도가 고요하여,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현미를 잃지 않고,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법계를 떠나지 않는 이는 오직 규봉조사 한사람뿐이다.



이처럼 국사는 종밀의『원각경소』에서 선교일치를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종과 교종의 치우친 고집을 종밀에 의해서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원각경』을 중시했던 광명사의 대선사 일공도 국사에게 협조했던 선승이다.

국사는 원효의 위대성을 절실하고도 정확하게 인식했다. 그는 어느 날 분황사의 원효상 앞에서 제를 모셨는데,다음은 당시에 지은 제문의 일부다. 오직 우리 해동보살만이 성과 상을 융화해 밝혔고, 고금의 잘 못을 바로잡아 백가의 다투는 실마리를 화합시키고 일대의 지극히 공정 한 논을 얻으셨거니와 하물며 헤아릴 수 없는 신통과 생각하기 어려운 묘용이었겠습니까. 비록 리끌 세상에 함께 해도 그 참됨을 더럽히지 않았고,비록 빛으로 화하나 그 본체를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명성 은 중국과 인도에까지 떨쳤고,자비로윤 교화는 유명을 덮게된 것 이오니, 그 찬양함에 있어서 참으로 무엇이라 형용하여 말하기가 거북합니다.

국사는 제문에서 '원효보살’,‘원효성사’ 등의 존칭을 사용하면서 까지 그 위대성을 강조했고,불교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원효 교학의 의의를 “고금의 잘못을 바로 잡고 백가의 논쟁을 화합시킨 것’으로 천명했다. 국사는 또한 “원효성사 오른쪽에 가는 선철은 없다.”고 하면서,“오직 용수와 마명 만이 원효에 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대승기신론』을 저술하고 대승불교를 제창한 마명과 대승불교의 진면목을 세 움으로써 제2의 석가로 불리던 용수,그리고 신라의 원효를 나란히 평 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식한 이들은 신라에 원효라는 한 스님이 살았다는 정도로만 알 뿐 그가 진정으로 위대한 성인이었음을 모른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국사는 원효를 비롯한 신라 승려들의 장소를 널리 구해 모은 적이 있다. 그가 편찬한『신편제종교장총록』에 원효의 저서 44부 87권을 수록했던 것도 이러한 노력의 소산이었다. 그는 또 원효, 경흥,태현 등의 장소를 송의 정원에게 보냈는가 하면,요의 천우제에게 원효의 장소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송나라 원소율사에게 원효의 십권능가경소를 보내면서 동봉 한 서신에서 “만일 10권본 능가경을 강의하려면 원효가 지은 소에 의 지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국사는 누구보다도 원효를 존경했고, 그 위대성을 송나라와 요나라에 까지도 두루 알리고자 했다. 이러한 국사의 노력은 ‘주체적 전통의 확립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무엇보다도 원효교학의 특징을 성상의 융화와 화쟁사상으로 인식한 그의 안목은 뛰어난 것이었다. 더구나 원효의 역사적 위상을 마명 및 용수와 나란히 설정한 것도 고금의 장소 수천 권을 섭렵한 국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5,의헌의 업적

국사는 불교학에 대한 깊고 넓은 이해를 가졌기에 장소의 수집과「신편제종교장총록」의 편성,속장경의 조판과그 전파 등의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소에 의해서 경론의 뜻이 분명히 통하게 된다고 보고,“경은 논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고 논은 소를 기다려서 통한다”고 하여 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그는 "경론을 비록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 장소가 없다면 법을 펼 길이 없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해동소에 의해서『금강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처럼 국사가 경론의 이해를 위해서 장소를 참고하고자 했음은 종래의 연구성과를 활용하려는 학자적 태도였다고 하겠다. 그는 고금의 현 철이 천년 동안이나 삼장을 연구하고 주석한 그 성과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천은 출가 8 년 만인 19세에 교장 수집을 다음과 같이 발원했다.



비록 경론은 갖추어졌으나 소초는 결여되었으니,예로부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요나라 송나라 여러 학승들의 과교를 하나의 장 전으로 모아서 널리 펴기를 원합니다.



그는 많은 장소가 없어지고 묻혀 감으로써 교학의 전통이 단절되어감을 안타까워했다. 국사는 송나라의 어느 법사에게 고금제가 의 장소목록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해오는 제가의 학설 가운데는 어떤 것은 책이 없어져서 유통되지 못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훅은 어로가 뒤섞인 것도 있으며,훅은 초해가 빠진 것도 있습니다. 오대로복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백년 간의 제사의 저술은 유통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분하여 거리의 먼 것을 잊고 특별히 와서 구법하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당말의 훼불로 인해서 침체된 중국불교의 문제를 지적하 기도 했는데, 오랜 세월 장소가 유통되지 못함으로써 고려 불교계에 미 친 영향까지도 유의하고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장소를 만세에 전해서 보존하고 유통시키려는 원대한 뜻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뜻을「신편제종교장총록』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기도 했다.



얻은 바 신구제찬의 제종의 장소에 대해서는 감히 사사로 비장하지 않고 간행하려 했고,책을 낸 뒤에도 새로 얻은 것이 있으면 거기에 기록하려 한다. 편집한 교장이 삼장의 정문과 더불어 영원 히 전해진다면 내 소원은 이루어진 것이다.



애써 모은 장소를 사사롭게 보관하지 않고 간행해서 두루 유포하며 1 또한 이들 교장이 오래오래 보존되어 전해질 수 있기를 염원했던 것이 다.

국사는 20여 년 동안이나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송나라,요나라,일 본 등지에서 수천 권의 소초를 수집했다. 그는 송나라에 체류하는 바쁜 일정 중에서도 많은 소초를 수집하여 귀국할 때에는 무려 3,000여 권을 가지고 왔다. 특히 송에서 구해온 전적 중에 반 이상은 아직 본국에 유통되지 않던 귀중한 것들이었다. 그는 입송 이전에도 여러 전적을 구했고,또한 귀국 후에도 이 일은 계속되었다. 국사의 명성을 들은 요의 천 우제도 대장경과 제종의 소초 6,900여권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국사는 일본의 여러 법사에게도 장소를 구하는 글을 보냈다. 그렇다 고 해서,이처럼 많은 전적들이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국가의 돈과 개인의 주머니를 털어서 구입한 것이었다. 이처럼 교장의 간행에는 고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 선종 8년 봄에 국사는 국내의 소초를 수집하기 위해서 남쪽 지방을 두루 다녔다. 그 결 과 4,000권의 전적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책들은 대부분 민지로 얼룩져서 글자가 희미하거나 좀이 먹어 헤어지거나,책장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앞뒤가 뒤바뀐 것들이었다. 이런 책들을 모두 수합하여 여러 학 자들에게 의뢰하여 오류와 빠진 부분을 교정하고 보완하며, 교감하는 노 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국사는 선종7년에『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했는데,이는 교장 간행에 필요한 기초 작업이었던 셈이다. 다음 해인 선종 8년에 흥왕 사에 교장사를 두고 제종의 교장을 간행하기 시작해서 국사가 입적하던 숙종 6년까지 이 일을 계속했다. 약 10년 동안에 국사가 주조 한 교장은 대략 4,000권 정도였는데, 이것을『신편제종교장총록』에 수록된 1,010부 4,857권과 대비해 보면, 목록에 수록된 장소류의 대부분이 간행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아깝게도 당시의 원본은 대부분 산일되고,그 원간본 및 중수복간본 등의 일부가 전하고 있어서 겨우 그 편모 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교장의 간행은 일찍이 다른 나라에서는 계획 된 바도 없는 고려불교의 독창적인 업적이었다. 수천 권에 이르는 서적 의 수집과 목록의 작성,간행할 소초의 선정과 교감,그리고 판각의 여러 작업 등 교장의 간행은 많은 고급인력의 동원이 필요한 것이고,경제 적인 뒷받침 또한 필수적인 것이었다. 교학에 해박한 여러 학승이 참여 하고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진 교장 간행의 대작불사는 고려 전기 불교문화의 융성을 그 토대로 한 것이었다. 국사는 대장경에 대한 연구서인 장소를 고려를 비롯한 송,요,일본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수 집하고,이를 간행 ‘ 유통시킴으로써 고려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불교문화를 하나로 연결시켰다. 특히 간행된 교장을 이웃의 여러 나라에 유통 시킴으로 해서 고려불교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시켰을 뿐만 아니라,불교 문화교류를 활성화시키기도 했다. 동아시아에 유통된 교장은 요긴하게 활용됨으로써 교학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종밀의 원각경대소초의 경우, 중국에서는 한 빈도 간행된 적이 없고,여러 필사본이 유통되면서 많은 오류가 있었다. 이에 의화는 고려판본을 구해서 중국의 여러 사본들과 비교'교감하여 1138년에 간행한바 있다. 고려판본은 아마도 고려에서 간행한 교장으로 생각된다. 국사는 요나라 황제 도종에게 원효의 저술을 보낸 바 있고,도종은『석마하연론통현초」인문에서 원효의 소를 언급했다. 이 또한 요나라에 서의 교장의 유통을 확인 시켜주는 사례다. 국사가 간행한 여러 장소들은 국사가 돌아간 4년 후인 1105년(숙종 1이에 일본에도 보내졌는데,이때 「반주삼매경』3권도 함께 보냈다. 이처럼 교장은 송, 요, 일본 등지에 유통되면서 실제로서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2) 불전의 해외유포

국사는 송나라에 갈 때 많은 불전을 가져다 전했는데,특히 정원에게 기증한 중국의 화엄장소는 주목할 만 하다. 지엄의「화엄수현 기』‘『공목장』‘「무성섭론소』“『기신론의기』, 법장의『화엄탐현기』ᅳ 「기신별기』‘『법계무차별론소』‘『십이문론소』‘「삼보제장문』,청량의 『정원신역화엄경소」,규봉의「화엄륜관」등 중국 화엄 삼가의 여

러 장소는 오대의 병화로 중국에는 이미 전하지 않은 지 오래된 책이었는데,국사가 송나라에 가져다 다시 유통시켰던 것이다. 국사는 귀국 후에도『금자화엄경』삼본 170권을 혜인사에 보냈고, 11이년에는 송나라 휘종의 즉위를 경하해서 은 천 수백 량을 보내어 화 엄경각의 건립을 도왔다. 여기에 정원과의 화가 수집하여 개판한 화엄종 관계 서적과 판목을 두었다. 이처럼 국사의 많은 도음에 의해서 혜인사에서 화엄종의 전적을 찾아서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 이래로 우리 나라에 전해지던 법장의 친필 편지 또한 국사가 중국으로 가져가서 전했을 가능성이 많다. 국사는 고려 이자현의 시집으로 추정되는『낙도집」을 송에 전하기도 했다.

국사는 그가 편찬한「원종문류』를 송나라의 변진과 도형 등에게 보냈다. 변진은 “지난해에 붙여 주신『원종문류』를 받고,아침저녁으로 손에서 놓지 않고 열심히 열람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훗날의 편지에서는 “은혜를 베풀어 보내신『원종문류』는 10년이 다 되었 지만,지금까지도 때때로 읽으면서 잠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이 책을 참고했던 것이다.「신편제종교장총록』또한 송나라의 여러 고승에게 보내졌다. 이 책을 받아본 유성은 “인편으로 받은『장소목록』1권을 향을 피우고 손을 씻은 뒤에 두루 보고는 우러러 찬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상인의 법을 전하려는 마음과도를 배우려는 뜻은 밥 먹는 동안에도 잊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라고 찬 양했다. 국사의『간정성유식론단과』도 송나라에 전해졌다. 이 책을 전해 받은 혜청은 “마음을 깨끗이 씻고 일어서서 받았습니다..라고 고마운 뜻을 전하기도 했다.



3) 천태종 개창

국사의 여러 업적 중에서도 천태종 개창이 갖는 의의는 더욱 크다. 국사는 어느 날 인예태후에게 천태종 개창의 뜻을 말하 여 동의를 얻은 바 있다. 그는 송나라에 머무는 동안 천태종의 종간,원정,중립,법린 등을 만났다. 그는 중립을 스승의 예로 뵈었고,그의 제자 법린을 친구로 삼았다. 그리 고 용정사의 원정을 방문하여 하루 종일 천태종에 대해서 논의하기도 했다. 국사는 본국에 있을때 종간의 명성을 들었고,항주에서는 그로부터 천태교관을 전수받았는데. 그 전법의 신표로수로를 전해 받기도 했다. 국사는 천태산의 지자대 사탑에 참배하고 귀국하면 천태교를 일으키겠다고 발원했 는데,다음이 그것이다.



모는 머리를 숙이고 천태교주 지자대사에게 아룀니다. …… 가만히 생 각하건대, 우리 나라에도 옛날 제관스님이 계셔서 대사의 교관 을 강의하여 해외에까지 유통시켰으나 그 전습이 끊어져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분발하여 몸을 잊고 스승을 찾아 도를 물었는데, 이제는 전당의 자변대사 강하에서 교관을 이어받아 조잡하나마 그 대략을 알게되었습니다. 타일에 본국으로 돌아가면 목숨 이 다하도록 선양하여 대사에서 중생을 위해 교를 펴신 노고의 덕에 보 답하는 것,이것이 저의 서원입니다.



이처럼 국사가 지자대사탑 아래에서 천태교관의 전파를 서원할 때,접 반관 양걸은 이 사실을 기록했고, 동행하고 있던 중립이 비석을 세웠다고한다. 국사가 천태교의 홍포를 발원하고 귀국한지 3년 만인 선 종 6년(⑴온이 10월에 인예태후는 국청사를 짓기 시작했다. 천 태종의 개창을 위한 첫 불사였다. 만일결사와 천태예참의 전을 행하면서까지 천태종 개창을 염원하던 태후가 1092년 9월에 돌아가고,2년 후 5월에는 선종이 승하함으로써 국사는 해인사로 퇴거 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국사는 해인사에 있을 때,“신은 성품이 전등을 사랑하였기에 교 리를 조금 알아서 호법에 뜻을 두었으나 시의에 맞지 않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했고,"신이 종실의 은혜는 깊지만, 불문의 덕은 적어, 돌아보면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함으로서써 품은 뜻은 있으나 펄 수 없어 산 속에 숨어 산지 오래입니다,’라고 했디‘. 그리고 그는 “굴욕을 당하면 서 여러 해 서울에 살았지만,교문에 이룬 공업 없음을 부끄러워한다”고 도 했다. 그가 굴욕을 당하면서까지 펴고자 했던 오랜 뜻이란 아마도 천 태종의 개창이었을 것이고,시의에 맞지 않았다거나 불문의 덕이 적다고 한 것 등은 경원이씨와 결탁한 법상종 세력의 비난이었을 것이다.

숙종 2년 2월에 국청사가 완공되었다. 숙종은 친히 경찬도량을 베풀었고,이해5월에 국사를 국청사의 주지로 삼았다. 국사는 이 절에 서 처음으로 천태교학을 강설하면서 지자대사탑 아래서 목 숨이 다하도록 법등 전할 것을 정성으로 맹세하였더니,이제 평생 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감격했다. 이때 지은 국사의 개강사는 천 태종 개창 선언의 성격이 있다. 국청사의 낙성으로 천태종은 종파 성립 의 여러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국사가 천태교학을 강설하자 1천명의 승 려가 천태종으로 들어왔다. 그후에도 국사는『법화현으』와 『본적십묘불이문』을 강의했고,천태예참은 국청사낙성 이전부터 행했다. 따라서 국청사가 낙성되고 국사가 이 절 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천태종의 개창은 공식화된것이 분명하다.

천태종의 개창은 고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국사 가 천태종의 개창을 처음으로 논의했던 것도 모후인 인예태후와 셋째형 인 계림공이 함께 한 자리였다. 훗날 태후는 천태종의 근본도량인 국청사를 시창했고,견불사에서 천태예참을 행하면서 만일결사를 주도 했다. 숙종은 국청사를 완공하여 국사를 주지로 삼았고,다시 천수사를 창건하여 천태교관을 홍포하려 하였다. 그리고 예종은 숙종의 뜻을 이어 천수사훌 완공시켰다. 이처럼 고려 왕실에서는 천태종의 개창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는 회삼귀일과 천태삼관의 교의를 국청과 연계시켰기 때문이고, 경원이씨 세력과 연걸 된 법상종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려 했던 정치적인 의도 또 한 없지 않았다.

국사는 선교 통합을 위해서 노력했는데,천태종 창립이 당시 선 종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국사는 천태종을 창립하고 선종의 덕망있는 고승을 모집했다. 이에 쌍봉사의 익종도 교응등의 여러 제자 를 이끌고 국사의 문하로 왔고,국사는 익종에게 천태의 유풍을 함께 진작시키자고 당부했다. 그리고 나이 많아 산으로 돌아가는 오선사에게도 천태유풍의 진작을 당부했다. 선종 승려 중에 천태종으로 옮 겨 온 자가 10명 중 6 ^ 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을 본 학일은 선종의 쇠퇴를 슬퍼하며 홀로 선종을 지켰는데, 국사가 사람을 보내어 여러 차례 권유 하였으나 끝내 그의 명을 받아들이지 아니 하였다 고 한다. 천태종의 창립에는 오문학도 700여 명과 국사의 문 하로 직접 온 300여 명 등 1,000여 명의 승려가 참가했었다.

숙종 6년에 천태종선이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국가 가 처음으로 시행한 천태종선은 봉은사에서 행해졌고, 주맹인 대각국사 는 천태종의 경론 120권으로 시험하여 40여 명을 선발했는데,교웅이 상상품으로 합격했던 것이다. 천태경론120권으로 치투는 엄격한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의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국사는 천태종 개창의 뜻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는데, 지자탑 아래에서의 발원으로 이 의지를 더욱 다졌다. 국사의 천태종 개창 과정 은 인예태후가 국청사를 짓기 시작한 선종 6년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는 승려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하여 1,000여 명이 동참하는 성 과를 얻었다. 국청사가 완공되고 국사가 이 절의 주지로 취임하여 천태 교관을 강설하게 됨으로써 고려의 천태종은 개창되었으니, 곧 숙종2년 5월의 일이었다.



4) 주전론

국사는 비록 출가수행자였지만,왕실의 지친이었기에 나라에 큰 문제가 있을 때면, 은밀하게 자문하곤 했다. 국왕과 함께 나라의 대사를 논의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계기로 백성에게 끼친 음덕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다. 주전론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주전 을 건의한 이 논의에서는 화폐로서의 미 ‘ 포가 지닌 여러 가지 결점을 열거하고, 용전의 이로움을 다음의 네 가지로 역설했다. 곧 용전을 시행하면 교함과 운반이 편하고,쌀과 베의 경우에서 생겨나 는 수취와 교환에 있어서의 부정을 방지할 수 있으며, 국가 관리의 봉급 중에서 그 반을 돈으로 지급하면,녹미의 독촉으로 피해를 입는 세민을 구제하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며, 미곡의 저축으로 흉년의 대비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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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의헌의 역사적 위상



당시 국사의 명성은 송나라뿐만 아니라 요나라와 일본에도 퍼져 있었다. 요의 천우제는 국사의 명성을 듣고 대장경과 제종의 소초 6,900여권과문서, 약물 ‘금백 등을 보냈고, 요나라에서 온 사신들은 모두 국사를 친견하고자 했으며,우리 사신이 요나라에 가면 국사의 안부를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창국의 고승시라박저도 국사를 지극히 존경하여 책서와 법복을 보내어 문안하였고,일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구하던 글과 책의 목록 중에는 국사의 비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국사는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주목받는 고승이었다.그의 교장 간행은 그 어떤 업적 보다도 중요한 것이었고,그것이 동아시아 불교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 이다. 또한 국사가 천태종을 개창함으로써 그것이 고려불교계는 물론이 고 그 이후의 우리나라 불교사에 준 영향도 대단히 큰 것이었다.

촌음을 아끼며 일생을 불교학 연구에 바친 국사는 탁월한 학자였다. 그는 신라불교,특히 원효불교를 계승하려 했고, 동아시아 불교가 이륙 해 온 많은 연구 성과 또한 간과하지 않으려고 했다. 불교 연구의 성과 인 장소의 소중함을 알고,이를 수집 ‘ 정리하여 교장(속장경)으로 간행 , 유포한 그의 업적은 동아시아불교사에서도 선구적인 것이었다. 의 천은 불교학 전반에 걸쳐 연구사적인 넓고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이 는 수천 권의 장소를 열람한 노력의 소산이었는데, 교장 간행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국사의 교학 연구 자세나 방법이 갖는 현대적 의의 또한 적지 않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학구열,전통에 대한 이해를 바 탕으로 하되 천년 이후를 생각하는 진지한 자세,동아시아 불교의 보편성과 신라 불교의 특수성에 대한 균형 있는 인식,활발한 국제학술교류, 방대한 자료의 수집,엄격한 비판과 정밀한 교정,후학을 위한 계속된 강의 등의 진리 탐구 자세는 지금도 그 빛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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