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와카하라 유쇼 若原 雄昭의 강의를 코끼리 상 앞에 있는 건물(다향관 세미나실)에서 들었다. <연기법송에 대해서-법송신앙의 확산과 그 해석의 전승>이라는 흥미 있는 발표문이었다. 끝난 후 두 개 정도 질문을 통역을 끼고 했다. 일본어를 한국말처럼 잘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 지적 호기심의 중구난방과 그 낭만성이 결국 훼방하는 것으로 결론 난 것이 인생 측면에서 못내 아쉬웠다. 물론 그게 내 삶이다. 미우나 고우나...
아무튼 강의자료를 보니 와까하라 유쇼의 발표문이 하나 더 보인다. <다르마dharma의 상속자>라는 제목의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인용이 있어 기록해 둔다.
「권위(pramana 量)」라는 것은 버릴 것과 취할 것을 정확하게 알고, 그것에 상응한 실천방법을 함께 가르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뭐든 알아서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sarvasyavedakah)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벌레의 수를 알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을 보는 자가 권위가 있다고 한다면, 오시오, 독수리를 예배합시다.
7세기의 저명한 불교철학자 다르마끼르띠 Dharmkirti의 『知識論評釋』(Pramana-varttika) 제1장 31-33 時節取意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