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과학과 불교|깨달음을 향한 몸과 마음의 작용
본지는 2011년부터 불교와 신경과학, 불교와 뇌 과학, 정서와 건강, 환경문제 등 현대인에게 필요한 다양한 주제들을 살펴보는 열린 기획을 연재하고 있다. 이 열린 기획의 연장으로 2014년에는 참된 깨달음은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인지과학과 불교’를 게재한다.
몸으로 생각한다
이인식│지식융합연구소 소장
이 글은 『몸의 인지과학』(프란시스코 바렐라 외 저, 석봉래 역, 이인식 해제, 김영사 刊, 2013. 7) 중 해제글로서 출판사와 해제자의 동의를 받아 소개한다. 다음 호부터 2회에 걸쳐서는 이 책의 번역자인 미국 앨버니아대학 석봉래 교수의 ‘『몸의 인지과학』에 나타난 불교와 인지과학의 만남’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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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은 오랫동안 객관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현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컴퓨터가 등장하면서부터 하드웨어를 사람의 뇌로, 소프트웨어를 마음으로 보게 됨에 따라 비로소 마음이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사람의 마음이 하는 일은 크게 인지와 정서로 나눌 수 있다. 이를테면 사람이 생각하고 느끼는 까닭은 마음의 작용 때문이다. 이 중에서 초창기에 과학자들이 관심을 가진 연구 주제는 인지기능이었다. 일반적으로 지식, 사고, 추리, 문제해결 같은 지적인 정신과정을 비롯하여 지각, 기억, 학습까지 인지기능에 포함된다. 요컨대 사람이 자극과 정보를 지각하고, 여러 가지 형식으로 부호화하여, 기억에 저장하고, 뒤에 이용할 때 상기해내는 정신과정이 인지이다. 이와 같이 인지기능이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마음 연구에 착수한 과학자들은 어떤 학문도 다른 학문과의 융합 없이 독자적으로 연구해서는 결코 마음의 작용에 관한 수수께끼를 성공적으로 풀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대 후반에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이 형성된 학문이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다.
인지과학의 주요한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인지과학은 철학, 심리학, 언어학, 인류학, 신경과학, 인공지능 등 여섯 개 학문의 공동 연구를 전제한다. 인지과학은 그 역사가 짧지만 동시에 6개 학문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융합 학문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둘째, 인지과학은 마음을 기호체계(symbol system)로 전제하기 때문에 사고, 지각, 기억과 같은 다양한 인지과정에서 마음이 기호를 조작한다고 본다. 마음이 기호를 조작하는 과정, 곧 특정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을 계산(computation)이라 한다. 따라서 인지과학의 지상 목표는 마음의 작용을 설명해주는 계산 이론을 밝혀내는 데 있다. 요컨대 인지과학은 마음을 기호체계로 간주하고, 마음이 컴퓨터의 기호 조작(계산)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고 여긴다.
마음을 연구하는 방법은 하향식(top-down)과 상향식(bottom-up)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하향식은 전체(위)가 부분(아래)을 결정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에 상향식은 부분의 행동이 전체를 결정하는 것으로 본다. 인지과학의 경우 뇌에 의해 수행되는 인지활동이 ‘위’라면, 뇌의 신경계 내부에서 발생하는 전기화학적 현상은 ‘아래’에 해당한다.
뇌와 마음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하향식으로 접근하는 인지심리학과 상향식을 채택하는 신경과학으로 갈라진다. 1970년대까지 인지심리학이 우세했지만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는 계산이론을 내놓지 못함에 따라 1980년대부터는 상향식의 신경과학이 크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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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과학의 초창기부터 정보처리 측면에서 몸의 역할은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인지과학자들에 따르면, 몸은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 세계의 정보를 획득하여 뇌로 전달하고, 이 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지시에 따라 운동기관을 통해 행동으로 옮긴다. 컴퓨터로 치면 몸은 입출력 장치에 불과하며 뇌만이 정보를 처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몸을 뇌의 주변장치로 간주하는 견해에 도전하는 이론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몸의 감각이나 행동이 마음의 인지기능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신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마음이 신체화되어 있다는 주장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이른바 제2 세대 인지과학의 대표적 이론가로는 미국의 언어철학자인 마크 존슨(Mark Johnson, 1949~ )과 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1941~ )를 꼽는다.
인간의 마음은 신체적 경험, 특히 감각운동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마음이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같아서
어떤 적절한 컴퓨터나 신경 하드웨어에도 작용할 수 있는
컴퓨터 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1987년 마크 존슨은 현대 철학에서 마음의 신체화를 처음으로 다룬 저서로 평가되는 『마음속의 몸(The Body in the Mind)』을 펴냈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서양의 주류 철학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던 몸의 중심성을 회복하는 것, 곧 ‘몸을 마음 안으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존슨은 이 책에서 “몸은 마음속에 있고, 마음은 몸속에 있으며, 몸·마음은 세계의 일부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레이코프와 공동 작업을 통해 체험주의(experientialism)라는 새로운 철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1999년 레이코프와 존슨은 『몸의 철학(Philosophy in the Flesh)』을 펴냈다. 책의 부제인 ‘신체화된 마음의 서구 사상에 대한 도전(The Embodied Mind and its Challenge to Western Thought)’처럼, 두 사람은 2002년 출간된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신체화된 철학, 즉 몸 안에서의, 몸의 철학을 건설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연구 배경을 설명했다.
1970년대 말부터 레이코프는 1957년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1928~ )가 펴낸 『통사구조론(Syntactic Structure)』으로 언어학의 주류가 된 형식언어학을 비판하면서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창시하였다.
『몸의 철학』은 레이코프와 존슨이 제안하는 신체화된 마음 이론을 집대성한 성과로 여겨진다. 두 사람은 이 책에서 ‘인지과학의 세 가지 주요한 발견’에 입각해서 신체화된 마음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두 사람의 표현을 빌리면 “마음의 과학에서 이 세 가지 발견은, 서양 철학의 핵심적 부분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인지는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한다.
즉 감각 운동 능력을 지닌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경험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첫째, 마음은 본유적으로 신체화되어 있다(마음의 신체화). 인간의 마음은 신체적 경험, 특히 감각운동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마음이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같아서 어떤 적절한 컴퓨터나 신경 하드웨어에도 작용할 수 있는 컴퓨터 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의 인지는 대부분 무의식적이다(인지적 무의식, cognitive unconscious). 의식적 사고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모든 사고의 95%는 무의식적 사고이다.
셋째, 우리의 사고는 대부분 은유적(metaphorical)이다(은유적 사고). 우리는 가령 ‘사랑은 여행’이나 ‘죽음은 무덤’과 같은 개념적 은유(conceptual metaphor)를 수천 개 사용하여 생각하고 말한다. 이러한 은유는 신체화된 경험에서 나온다. 그래서 은유가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마음의 신체화, 인지적 무의식, 은유적 사고는 한데 묶여서 이성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고 전제하면서 특유의 신체화된 마음 이론을 정립했다.
한편 레이코프는 인지언어학을 정치학에 접목시킨 진보적인 이론가로도 유명하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도덕, 정치를 말하다(Moral Politics)』(1996, 2002), 『코끼리는 생각하지마(Don’t Think of An Elephant)』(2004), 『정치적 마음(The Political Mind)』(2008)은 인지언어학의 연구 성과를 미국 정치와 선거에 적용하여 진보 진영의 정치적 좌절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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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마음속의 몸』 출간을 계기로 논의가 시작된 신체화된 인지 개념은 1991년 세 명의 학자가 함께 펴낸 바로 이 책 『몸의 인지과학(The Embodied Mind)』에 의해 인지과학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 1946~2001), 미국의 철학자인 에반 톰슨(Evan Thompson, 1962~), 미국의 인지심리학자인 엘리노어 로쉬(Eleanor Rosch 1938~)는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융합 연구를 통해 독특한 신체화된 인지이론을 정립했다. 이들은 동서양의 사상가를 각각 한 명씩 끌어들여 몸과 마음의 관계를 흥미롭게 분석했다. 한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인도의 승려인 용수(龍樹, 150경~250경)이다.
메를로 퐁티는 프랑스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와 함께 활동하면서, 현상학 창시자인 독일의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후기 학설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실존주의적 현상학을 전개하였다. 주관과 객관, 자연과 정신 등의 이원론적 분열을 배격한 메를로퐁티에게 인간은 신체를 통해 세계 속에 뿌리를 내리는 존재인 ‘신체적 실존’이다. 1945년 펴낸 『지각의 현상학』 서문에서 메를로 퐁티는 “세계는 나의 모든 사고와 나의 모든 분명한 지각의 자연스런 배경이며 환경이다”라고 설파했다. 이러한 신체적 실존에 있어서 마음은 ‘신체를 통하여 체현된’ 것이며 지각이야말로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관계인 것이다. 이를테면 신체적 실존의 현상을 강조한 메를로퐁티는 마음에 관한 연구인 인지과학에서 인간의 경험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서기 2세기 후반에 대승불교 사상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한 용수는 중관론(中觀論)의 창시자이다. 중관론 또는 중론(中論)은 주관과 객관, 대상과 속성, 원인과 결과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분법을 배격한다. 용수는 독립적인 존재성을 지닌 어떠한 것도 결코 발견될 수 없으므로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러한 이유로 공(空)이 아닌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완전한 상호의존성에 관한 용수의 논증은 연기(緣起)의 이론에 관한 그의 저작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연기는 ‘여러 방식으로 발생하는 조건들에 의존함’ 또는 ‘상호의존적 발생’을 의미한다. 연기의 개념을 기본으로 하는 용수의 중론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극단을 배격하는 중도(middle way)의 입장이라는 측면에서 메를로 퐁티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메를로 퐁티와 용수가 언급된 이유는 자명하다. 인지가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인지는 감각 운동 능력을 지닌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경험에 의존하는 것”임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런 맥락에서 저자들은 독특한 신체화된 인지이론을 제안했는데, 다름 아닌 발제주의(發製, enactivism) 또는 발제적 인지과학(enactive cognitive science)이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그 의미를 천착하는 독서 여행을 떠나면 될 것 같다.
이 책 『몸의 인지과학』이 출간되기 전에 대표 저자인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그의 스승인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움베르또 마뚜라나(Humberto Maturana, 1928~)와 함께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1987, 1992)를 펴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이 책의 부제는 ‘인간 이해의 생물학적 뿌리(The Biological Roots of Human Understand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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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화된 인지이론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과학적 증거가 없어 한때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사례가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가령 뜨거운 커피 잔을 들고 있거나 실내 온도가 알맞은 방 안에 있으면 낯선 사람을 대하는 사람의 기분도 누그러졌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협상하면 마음이 부드러운 남자도 상대를 심하게 다그쳤다.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 산에 오르면 비탈이 더 가파르게 느껴졌다. 목이 마르면 물이 들어 있는 병이 더욱 가까이 있는 듯한 착각을 했다. 이런 실험 결과는 몸의 순간적인 느낌이나 사소한 움직임, 예컨대 부드러운 물건을 접촉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이 사회적 판단이나 문제해결 능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요컨대 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깨끗함, 따뜻함, 딱딱함과 같은 감각도 인지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 셈이다.
신체화된 인지이론의 입지를 강화해준 대표적인 연구 성과는 맥베스 부인 효과(Lady Macbeth effect)의 발견이다. 맥베스 부인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남편과 공모하여 국왕을 살해한 뒤 손을 씻으며 “사라져라. 저주받은 핏자국이여”라고 중얼거린다. 그녀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지만 손을 씻으면 죄의식도 씻겨 내려간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캐나다의 종첸보(Chen-Bo Zhong)와 미국의 캐티 릴렌퀴스트(Katie Liljenquist)는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윤리적 행위나 비윤리적 행위를 했던 과거를 회상하도록 했다. 그리고 W_ _H와 S_ _P를 완성하게 했다. 실험 결과 비윤리적 행위를 떠올린 학생들은 W_ _H를 가령 WISH 가 아니라 WASH, S_ _P를 STEP이 아니라 SOAP처럼 몸을 씻는 행위와 관련된 단어로 완성할 가능성이 윤리적 행위를 회상한 학생들보다 더 높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비윤리적 행위를 떠올린 학생들은 자신의 마음이 더렵혀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비누로 손을 씻으면 마음도 깨끗해질 것이라고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종교 의식에서 물로 세례를 하는 이유도 죄악이 씻겨 내려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험 결과는 ‘맥베스 부인 효과’라고 명명되어 2006년 『사이언스(Science)』 9월 8일자에 발표되었다. 맥베스 부인 효과는 마음이 윤리와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때 몸의 도움을 받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몸이 마음의 인지기능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신체화된 인지이론을 뒷받침하는 뇌 연구 결과도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2008년 미국 에모리대학의 심리학자인 로렌스 바살로우(Lawrence Barsalou)는 『연간 심리학 평론(Annual Review of Psychology)』에 실린 논문에서 “뇌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몸의 경험을 모의(simulation)하기 때문에” 마음의 인지기능이 ‘몸에 매인(embodied)’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인식|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과 KAIST 겸직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지식융합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융합한 지식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하는 과학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지식의 대융합』, 『나노기술이 세상을 바꾼다』,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 『이인식의 멋진 과학』, 『자연에서 배우는 청색기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