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8일 목요일

독수리

어제는 와카하라 유쇼 若原 雄昭의 강의를 코끼리 상 앞에 있는 건물(다향관 세미나실)에서 들었다. <연기법송에 대해서-법송신앙의 확산과 그 해석의 전승>이라는 흥미 있는 발표문이었다. 끝난 후 두 개 정도 질문을 통역을 끼고 했다. 일본어를 한국말처럼 잘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 지적 호기심의 중구난방과 그 낭만성이 결국 훼방하는 것으로 결론 난 것이 인생 측면에서 못내 아쉬웠다. 물론 그게 내 삶이다. 미우나 고우나...
아무튼 강의자료를 보니 와까하라 유쇼의 발표문이 하나 더 보인다. <다르마dharma의 상속자>라는 제목의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인용이 있어 기록해 둔다.
 
권위(pramana )라는 것은 버릴 것과 취할 것을 정확하게 알고, 그것에 상응한 실천방법을 함께 가르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뭐든 알아서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sarvasyavedakah)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벌레의 수를 알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을 보는 자가 권위가 있다고 한다면, 오시오, 독수리를 예배합시다.
 
7세기의 저명한 불교철학자 다르마끼르띠 Dharmkirti知識論評釋(Pramana-varttika) 131-33 時節取意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2014년 7월 22일 화요일

上報四重恩 下濟三途苦(상보사중은 하제삼도고)

上報四重恩 下濟三途苦

원각경 직해(감산 스님) 책 간행질 말미에 나오는 글이다.



사중은(四重恩): 부모와 대중과 임금과 스승(불보살)에 입은 은혜를 일컫는 용어. 군사부에 중생을 더한 은혜라...유교적 질서에 편입되거나 정치권력과 타협하는 측면이 있다.

삼도고(三途苦=獄, 畜生, 餓鬼)


















乾隆四十七年壬寅長夏山陰平聖臺齋沐敬書
 
 
大方廣圓覺經直解序...天啓二年歲次壬戌(1622)仲夏望日 中興曹溪嗣法沙門憨山釋德淸撰 / 大方廣圓覺經直解後序...明天啟壬戌中秋日新安內史程夢旸拜 (後序) / 重刻圓覺經直解後序峕 乾隆四十七年壬寅長夏山陰平聖臺齋沐敬書(後序) / 續圓覺經深信念佛序(後序)
 
圓覺經直解重刻後跋光緖十年夏日戀西學人古崑謹識

2014년 7월 10일 목요일

계(이자랑, 법보신문 연재)

목 차



이자랑박사의 '계율 교실'




목 차

이자랑박사의 '율장 속 부처님 이야기'









목 차

혜거스님의 '좌선의(坐禪義)' 강의




목 차


무비스님의 당신은 부처님





조사어록 목차



제1장 마음 닦는 법 [普 照]
제2장 마음을 살피는일 [達 摩]
제3장 본원 청정심 [黃 檗]
제4장 참선에 대한 경책 [中峰.般若.楚石.博山.蒙山]
제5장 육조의 법문 [慧 能]
제6장 상단 법어 [眞覺 · 太古 · 懶翁]
제7장 선가의 거울 [西 山]
제8장 출가사문에게 보내는 글 [野雲 · 元曉]





보조국사 『수심결』
영가현각 『증도가』

2014년 6월 2일 월요일

六法,육법,五陰과 假人

大乘玄論 (No. 1853) 0035b20 - 0037a20: 六法爲正因佛性故經云不即六法不離六法言六法者即是五陰及假人也

2014년 5월 16일 금요일

몸의 인지과학The Embodied Mind: Cognitive Science and Human Experience.프란시스코 바렐라 Francisco Varela외 지음, 석봉래 옮김, 이인식 해제, 김영사 刊, 2013. 7

『몸의 인지과학』에 나타난
불교와 인지과학의 만남 (1)
석봉래│미국 앨버니아대 철학 석좌 교수












프란시스코 바렐라 외 지음, 석봉래 옮김, 이인식 해제, 김영사 刊, 2013. 7



오직 마음만이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마음의 자기 성찰적 능력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마음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가? 도대체 마음은 무엇인가? 마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지만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매 순간 느끼고 마주하고 생각하고 즐기는 것이지만 한순간 낯설고 이상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좀처럼 기회가 없다. 이제 이 가깝고도 먼 이웃에 관한 지식은 과학과 철학과 종교를 모두 바꾸어버릴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우리 모두는 마음이 있지만 정작 우리는 마음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마도 마음에 대한 과학이 필요한 모양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이 작업을 시작했다. 근대 유럽의 심리학이 이 길을 개척했다. 그리고 이제  급성장하는 인지과학이라는 복합적 연구 접근법이 이 길을 다듬고 있다. 인지과학은 철학, 심리학, 신경과학, 인류학, 언어학, 컴퓨터 과학이 협동 또는 협업하는 연구 프로그램이다. 단일 학문 하나로는 부족해서 이제는 온갖 학문이 동원되어 마음의 정체를 풀고자 한다. 그래도 마음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다. 아직도 수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마음에 관해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 이반 톰슨(Evan Thompson), 그리고 엘리노어 로시(Eleanor Rosch)도 마음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다. 이분들은 나름대로 인지과학(철학, 심리학, 생물학)에서 각각 일가를 이룰 만큼 학문적 깊이가 있는 학자들이다. 그런데 이 세 학자들이 하나의 주제로 협동 저서(『몸의 인지과학(The Embodied Mind- Cognitive Science and Human Experience)』)를 발간했다. 이 책은 20여 년 전(1991년)에 출간되어서 이제는 조금 오래된 듯하지만 여전히 강한 메시지로 인지과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통상적 이해를 흔들고 있다. 도대체 이들이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이 책이 중요한가? 특별히 왜 이분들은 불교를 인지과학과 연결시키는가? 이 책의 서문(들어가는 글)을 읽어보면 왠지 모르게 인지과학의 정통을 꿰뚫으면서도 그것에 반항하는 놀라운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인지과학으로 철학적 깊이나 종교적 심오성을 느끼게 하는 것을 보면 이 책은 범상한 책이 아닌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이들이 쓴 『몸의 인지과학』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몸과 마음, 인지과학, 그리고 불교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물론 이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면 학제적(interdisciplinary) 상상력이 필요하다. 한 가지 학문에 집중하던 때는 지났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다차원적이며 복합적인 총체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현대 학문과 과학의 추세로 인지과학도 그런 학문이다.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 인지과학인데 보통 인지과학을 제대로 연구하려면 한두 학문으로는 부족해 두루 섭렵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서너 학문을 공부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지과학은 쉽지 않은 학문이다. 그런데 인지과학에는 두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첫째로 인지과학은 생물학, 사회학과 같은 학문이 아니다. 인지과학은 학제적 연구 프로그램(interdisciplinary research program)이다. 즉 인지과학은 특정한 주제를 위한 연구의 전략적 제휴체이다. 그래서 인지과학이라는 독립된 학과가 있는 대학은 없다. 인지과학은 따라서 학문들의 협동적 조직을 통해 구성되고 존재한다. 구체적 연구 프로젝트와 공적인 연구비를 지원해 학문 발전이 이루어지는 현대적 학문 발전 모델에서 이해될 수 있는 지적 현상이 인지과학이다. 둘째로 인지과학을 마음(심적 현상 혹은 인지현상)을 연구하는 연구 프로그램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의 자체가 너무 광범위하다. 인지과학은 단지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마음을 특정한 ‘방법’으로 혹은 특정한 ‘관점’에서 연구하는 학문적 공동체이다. 역사적으로 인지과학의 태동기(1950~1960년대)에는 다양한 방법론이 시도되었지만 계산론적 방법론(computational methodology)이 인지과학의 정통으로 자리 잡게 된다. 따라서 인지과학은 계산론적 방법을 통해 마음을 연구하는 학제적 프로그램이다. 계산론적 방법이란 인지현상(사고, 판단, 결정에 관련된 현상)을 정보(표상)의 연산적 과정의 결과물로 간주하는 방법론이다. 여기서 연산이란 생각(정보나 표상)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변환시키는 과정인데 주로 이 과정은 형식적(formal) 과정(생각이 그 의미나 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물리적 특징을 통해 처리되는 과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내가 자판으로 ‘나무’라는 단어를 컴퓨터에 입력하면 컴퓨터는 나무라는 말의 의미를 가지고 이 입력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라는 신호의 전기적 특징(0과 1의 전기적 신호 패턴)을 통해 이 입력을 처리(저장, 변환, 출력 등등)한다. 물론 우리가 나무를 생각할 때는 이런 형식적 연산 방식이 일어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사고의 체계적 구성이나 논리적 분석 능력을 설명하려면 형식적 연산 과정을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 인지과학의 고전적 입장이다. 예를 들어, [(1)나무는 식물이다. (2)식물은 생명체이다. (3)따라서 나무는 생명체이다]라는 논리적 사고의 흐름을(특별히 (1)과 (2)에서 (3)이 도출되는 과정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사고가 형식적 연산 방식을 통해(즉 A는 B이고, B는 C라면, A는 C라는 형식적 패턴의 파악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의 인지과학』의 불교적 자기 집중과 각성을 통한 지혜는 인지가 갖는
새로운 차원을 계산적 정보처리가 아니라 인지 주체가 환경과 공동 발제하는 자기 변형적 상호작용의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이 점이 저자들이
새로운 인지과학의 가능성을 논의할 때 불교에 열광하는 이유이다.




간단히 말하면 계산론이란 생각(인지현상)을 컴퓨터의 정보처리 과정과 동일시하는 입장이다. 이 가정은 현재 우리에게는 설득력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매우 놀라운 가정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선조들은 생각(사고 과정)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분명하게 이해한 적이 없었다.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심리 과정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측정과 점검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컴퓨터라는 기계의 등장으로(정확히 말해서는 계산 과정이라는 개념의 명료화와 이것의 기계적 실체화를 통해서) 개선되었다. 이제 과학자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사고 과정에 관해서도 연구하고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혁명적 변화가 계산론적 방법론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이 방법론의 확인과 적용이 초기의 인지과학이었으며 그 극단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人工知能)이다. 인공지능이라는 연구 프로그램은 이 계산론적인 방법을 통해 사고를 설명할 뿐 아니라 사고를 기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인공지능을 통해서 많은 공학자들은 마음을(사고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음을(사람과 같이 생각하는 기계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인공지능은 계산론적 인지과학을 통해서 과학과 기술 그리고 마음과 기계의 절묘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이 지점에서 바렐라, 톰슨, 그리고 로시의 『몸의 인지과학』이 시작된다. 『몸의 인지과학』은 일단 이러한 인지과학 내부에 존재하는 계산론적 맹신론에 제동을 건다. 계산론적 방법은 너무도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계산론적 과정 이외에도 인간의 사고와 판단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방식은 계산 방법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숫자를 계산할 때는 글자 그대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계산 방법을 쓰는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다른 경우에는 (예를 들어 감각, 지각, 판단, 기억 등등) 계산론이 아닌 다른 과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닐까? 계산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바렐라, 톰슨, 그리고 로시 이외에도 다른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에 의해서도 제기된 것이라 특별히 독창적인 것은 없다. 예를 들어 미국의 철학자 존 설(John Searle)은 중국 방(Chinese Room)이라고 알려진 사고 실험을 통해 계산적 정보처리 과정이 언어 이해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고립된 방안에서 중국어 번역 알고리즘을 시뮬레이션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중국어 이해 능력을 줄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존 설의 주장이다. 또 인지과학에 대해 현상학적 비판을 가하는 휴버트 드레퓌스(Hubert Dreyfus)는 상식적 세계 이해(common sense knowledge)는 형식적 규칙(formal rule, 내용과 관계없는 추상적이며 일반적인 패턴을 이용하는 규칙)을 통한 계산적 추론 과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대상에 관한 간단한 물리적 조작(벽돌 쌓기, 병마개 따기 등등) 혹은 사회적 행동 같은 상식적 인간 활동은 형식적 규칙의 연산 과정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인간의 상식적 혹은 신체적 세계 이해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바렐라, 톰슨, 그리고 로시의 계산론에 대한 참신한 비판은 무엇인가? 이들은 두 가지 수단으로 계산론의 한계를 넘으려고 한다. 그 둘은 몸과 경험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디에 있는가? 불교는 이 두 가지 요소를 통해 자기 변형적 지식을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예가 된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며 지혜의 종교이다. 불교적 자기 집중과 각성을 통한 지혜는 인지가 갖는 새로운 차원(앎, 지혜, 이해, 창조적 직관)을 계산적 정보처리가 아니라 인지 주체가 환경과 공동 발제하는 자기 변형적 상호작용의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이 점이 이들 저자들이 새로운 인지과학의 가능성을 논의할 때 불교에 열광하는 이유이다. 
인지과학과 불교가 연결되는 고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서양 근대 철학의 거인인 데카르트(Descartes)의 철학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실은 데카르트 이전에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같은 철학자들이 마음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물론 동양의 성현들(공자, 맹자, 순자, 노자, 장자, 주자, 왕양명, 이퇴계, 이율곡 등등)도 이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현재 인지과학과 직접 관련되는 주장을 했기 때문에 마음에 관한 그의 주장은 인지과학의 역사적 배경에서 항상 언급된다. 먼저 데카르트는 마음(mind)은 몸(body)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몸은 물리적 구조(즉 공간적으로 드러난 존재)이지만 마음은 공간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용과 의미를 담지하는 존재이다. 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실체이다. 한 손으로 치는 박수가 소리가 없는 것처럼 물리적 실체인 몸은 비물리적 실체인 마음과 상호작용할 수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둘은 매우 밀접하게 상호작용하고 있다. 내가 이 문장을 쓰려고 의도하면(마음이 의도하면) 내 손(몸)은 이 의도를 따라 이 문장을 자판에 치고 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이 상호작용을 설명하려 노력했지만 몸과 마음을 근본적으로 분리하는 이원론적 가정 때문에 결국 이 문제에 관해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심신 문제(The Mind Body Problem)라는 철학적 난제를 남겼다. 사실 몸과 마음을 애초에 분리하지 않았다면 심신 문제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세계를 기계적이며 물리적인 대상들의 상호관계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비물리적인 마음의 존재가 항상 문제될 수밖에 없다.

나와 나의 생각과 마음은 영혼과 같은 견고한 실체성을 갖는
존재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의 잠정적 부산물 같은 것이 아닐까라고 저자들은 생각한다.



두 번째로 그는 마음은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라고 했다. 마음은 본질적으로(감성적이라기보다는) 지성적인 것이고 또 (과정이나 속성이라기보다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는(또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실체라는 것은 속성, 과정, 혹은 기능과는 구분되는 형이상학적 범주이다. 모양, 크기, 혹은 색 같은 것들은 속성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대상에 의존(부속)해 존재하는 것들이다. 성장 혹은 사멸과 같은 것들도 보통 속성으로 간주되는데 특별히 이들을 과정이라고 한다. 지각, 결정, 사고 등등은 기능이라고 하는데 이들도 보통 속성으로 간주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마음은 물론 특별한 속성, 과정, 혹은 기능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실체라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한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은 한 개인의 존재에 핵심적인 것이다. 나라는 존재(자아)는 바로 나의 생각하는 마음이다. 내가 생각하길 그친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다시 말해 마음은 생각하는 실체이며 한 개인의 동일성을 뒷받침하는 기반이다. 마음이 개인의 동일성을 확보해주는 생각하는 비물리적 실체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영혼이다. 마음은 영혼(soul)과 같은 존재이다. 나의 동일성을 담보하는 존재이며 비물질적이고 몸과는 분리되어 존재하면서 나의 의식 속에 분명히 드러나는 실체이다. 과연 마음은 영혼과 같은 것일까?

바렐라, 톰슨, 그리고 로시는 이런 데카르트적인 사고를 공격한다. 먼저 마음이 독립적 실체가 되면서 물리적 세계와 분리되었다. 다음으로 사고(思考)는(생각은 개인적 존재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주관적 독백이 되어서 세계와의 소통이 어려워졌다. 마음과 사고가 인간 존재의 중심이라는 데카르트의 생각에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물리적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거나 사고가 그 대상에 단지 간접적으로(마음속의 이미지를 통해서만) 관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인간의 존재와 경험을 물리적 사회적 환경에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하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의자’라는 것을 생각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생각은 물리적 대상인 의자가 존재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의자를 상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의자라는 생각은 나에게는 기본적으로 표상적 성격을 갖는다. 의자라는 나의 생각은 의자의 특정한 속성들(크기, 모양, 색 등등)을 내가 내 마음속에서 심상(심적 표상, mental representation)으로 떠올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데카르트의 입장을 따르면 마음은 심리적 실체이고 생각은 심적 표상 혹은 심상의 구성이나 처리이다. 물리적 세계는 실재하기는 하지만(본질적으로 물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입장에서 보면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없는 영역일 뿐이며 사고의 입장에서 보면 단지 마음이 구성한 표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의자라는 개념 그리고 의자에 관한 생각은 비물리적이거나 순수 표상적이지만은 않다. 의자는 내가 앉을 수 있는 것, 나를 지지할 수 있는 것, 나의 손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 내가 타고 오를 수 있는 것, 내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권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 즉 신체적 사회적 환경 내에서 감각운동적 상호작용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이 점이 바렐라, 톰슨, 그리고 로시가 생각하는 사고의 상호작용적 개방성이다. 살아 있는 인간 경험과 사고에서 물리적 세계는 마음과 대치하지 않으며 생각은 한 개인의 마음속에서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고와 대상은 공동의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바렐라, 톰슨, 그리고 로시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철학은 생각을 나의 존재와 세계의 살아 있는 상호작용이나 창조적 상호 규정의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고 단지 표상적 반영의 관계로(거울이 대상의 이미지를 반영하듯이) 이해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접근법이다. 이 접근법은 세계와 나 자신 그리고 내 마음과 나의 신체가 연속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차단하며 이 둘 사이의 깊은 간극을 허용한다. 앞서의 예에서처럼 의자와 나의 생각이 물리적이며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통합되지 않고 의자는 의자대로, 내 생각은 내 생각대로 따로 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과 세계는 상호 고립되며 대치하게 되는데 이런 연유로 데카르트는 자신의 생각이 실제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혼자만의 환상이 아닐까 혹은 악마의 장난에 놀아나는 착각이 아닐까 끝없이 걱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립적인 이원론은 사고에 대한 표상적 해석을 가정하는 계산론적 방법에 인지과학이 집착하는 것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계산론적 입장에서 사고는 정보 처리이며 이때 정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표상적 정보를 말한다. 또 보다 근본적으로 현대적 인간 상실의 근저에 나타나는 소외와 단절에서도 이런 이원론적 사고의 병리적 흔적이 나타난다. 사회적 조직체와 물리적 세계가 건강한 상호작용과 소통을 허용하지 않으면 인간은 소외되고 사고는 경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마음과 생각과 인간 존재에 대한 데카르트적 성찰이 의미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성찰이 너무도 추상화되었고 왜곡되었음을 이들 저자들은 주장한다. 반성적 사고와 활동적 마음에서 너무 급하게 사고의 고립적이며 표상적 본성과 자아의 독립적 실체성으로 나간 것이 데카르트 철학의 문제였던 것이다. 시간을 갖고 담담하게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다면 마음과 생각과 자아가 세계와 연결되어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반드시 실체성을 갖는 비신체적(非身體的) 마음의 존재로 통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와 나의 생각과 마음은 영혼과 같은 견고한 실체성을 갖는 존재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의 잠정적 부산물 같은 것이 아닐까라고 저자들은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독자들은 이미 저자들의 불교적 성향을 눈치 챘을 것이다.
석봉래|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리조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신경과학 박사 후 과정을 거쳐 현재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앨버니아 대학(Alvernia University)에서 철학 석좌 교수(Neag Professor of Philosophy)로 재직하고 있다. 철학과 인지과학 분야의 책과 논문들을 발표해왔으며, 인지 단원성(Cognitive Modularity) 연구는 미국의 인지과학 잡지인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에 게재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체화된 도덕 심리학과 유교철학(Embodied Moral Psychology and Confucian Philosophy)』이 있고, 「신경과학, 도덕 감성론, 그리고 유교철학: 신체와 감정의 도덕 심리학(Neuroscience, Moral Sentimentalism, and Confucian Philosophy: Moral Psychology of the Body and Emotion)」 등의 논문이 있다.   







출처, [불교와 문화] 2014년2월호, 대한불교진흥원 















[2014년1월호]
인지과학과 불교│깨달음을 향한 몸과 마음의 작용


인지과학과 불교|깨달음을 향한 몸과 마음의 작용

본지는 2011년부터 불교와 신경과학, 불교와 뇌 과학, 정서와 건강, 환경문제 등 현대인에게 필요한 다양한 주제들을 살펴보는 열린 기획을 연재하고 있다. 이 열린 기획의 연장으로 2014년에는 참된 깨달음은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인지과학과 불교’를 게재한다.
몸으로 생각한다
이인식│지식융합연구소 소장

이 글은 『몸의 인지과학』(프란시스코 바렐라 외 저, 석봉래 역, 이인식 해제, 김영사 刊, 2013. 7) 중 해제글로서 출판사와 해제자의 동의를 받아 소개한다. 다음 호부터 2회에 걸쳐서는 이 책의 번역자인 미국 앨버니아대학 석봉래 교수의 ‘『몸의 인지과학』에 나타난 불교와 인지과학의 만남’을 싣는다.

    1
사람의 마음은 오랫동안 객관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현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컴퓨터가 등장하면서부터 하드웨어를 사람의 뇌로, 소프트웨어를 마음으로 보게 됨에 따라  비로소 마음이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사람의 마음이 하는 일은 크게 인지와 정서로 나눌 수 있다. 이를테면 사람이 생각하고 느끼는 까닭은 마음의 작용 때문이다. 이 중에서 초창기에 과학자들이 관심을 가진 연구 주제는 인지기능이었다. 일반적으로 지식, 사고, 추리, 문제해결 같은 지적인 정신과정을 비롯하여 지각, 기억, 학습까지 인지기능에 포함된다. 요컨대 사람이 자극과 정보를 지각하고, 여러 가지 형식으로 부호화하여, 기억에 저장하고, 뒤에 이용할 때 상기해내는 정신과정이 인지이다. 이와 같이 인지기능이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마음 연구에 착수한 과학자들은 어떤 학문도 다른 학문과의 융합 없이 독자적으로 연구해서는 결코 마음의 작용에 관한 수수께끼를 성공적으로 풀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대 후반에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이 형성된 학문이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다.

인지과학의 주요한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인지과학은 철학, 심리학, 언어학, 인류학, 신경과학, 인공지능 등 여섯 개 학문의 공동 연구를 전제한다. 인지과학은 그 역사가 짧지만 동시에 6개 학문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융합 학문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둘째, 인지과학은 마음을 기호체계(symbol system)로 전제하기 때문에 사고, 지각, 기억과 같은 다양한 인지과정에서 마음이 기호를 조작한다고 본다. 마음이 기호를 조작하는 과정, 곧 특정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을 계산(computation)이라 한다. 따라서 인지과학의 지상 목표는 마음의 작용을 설명해주는 계산 이론을 밝혀내는 데 있다. 요컨대 인지과학은 마음을 기호체계로 간주하고, 마음이 컴퓨터의 기호 조작(계산)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고 여긴다.

마음을 연구하는 방법은 하향식(top-down)과 상향식(bottom-up)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하향식은 전체(위)가 부분(아래)을 결정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에 상향식은 부분의 행동이 전체를 결정하는 것으로 본다. 인지과학의 경우 뇌에 의해 수행되는 인지활동이 ‘위’라면, 뇌의 신경계 내부에서 발생하는 전기화학적 현상은 ‘아래’에 해당한다.

뇌와 마음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하향식으로 접근하는 인지심리학과 상향식을 채택하는 신경과학으로 갈라진다. 1970년대까지 인지심리학이 우세했지만 마음의 작용을 설명하는 계산이론을 내놓지 못함에 따라 1980년대부터는 상향식의 신경과학이 크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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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과학의 초창기부터 정보처리 측면에서 몸의 역할은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인지과학자들에 따르면, 몸은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 세계의 정보를 획득하여 뇌로 전달하고, 이 정보를 처리하는 뇌의 지시에 따라 운동기관을 통해 행동으로 옮긴다. 컴퓨터로 치면 몸은 입출력 장치에 불과하며 뇌만이 정보를 처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몸을 뇌의 주변장치로 간주하는 견해에 도전하는 이론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몸의 감각이나 행동이 마음의 인지기능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신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마음이 신체화되어 있다는 주장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이른바 제2 세대 인지과학의 대표적 이론가로는 미국의 언어철학자인 마크 존슨(Mark Johnson, 1949~ )과 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1941~ )를 꼽는다.

인간의 마음은 신체적 경험, 특히 감각운동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마음이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같아서
어떤 적절한 컴퓨터나 신경 하드웨어에도 작용할 수 있는
컴퓨터 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1987년 마크 존슨은 현대 철학에서 마음의 신체화를 처음으로 다룬 저서로 평가되는 『마음속의 몸(The Body in the Mind)』을 펴냈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서양의 주류 철학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던 몸의 중심성을 회복하는 것, 곧 ‘몸을 마음 안으로 되돌려놓는 것’이다. 존슨은 이 책에서 “몸은 마음속에 있고, 마음은 몸속에 있으며, 몸·마음은 세계의 일부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레이코프와 공동 작업을 통해 체험주의(experientialism)라는 새로운 철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1999년 레이코프와 존슨은 『몸의 철학(Philosophy in the Flesh)』을 펴냈다. 책의 부제인 ‘신체화된 마음의 서구 사상에 대한 도전(The Embodied Mind and its Challenge to Western Thought)’처럼, 두 사람은 2002년 출간된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신체화된 철학, 즉 몸 안에서의, 몸의 철학을 건설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연구 배경을 설명했다.

1970년대 말부터 레이코프는 1957년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1928~ )가 펴낸 『통사구조론(Syntactic Structure)』으로 언어학의 주류가 된 형식언어학을 비판하면서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창시하였다.

『몸의 철학』은 레이코프와 존슨이 제안하는 신체화된 마음 이론을 집대성한 성과로 여겨진다. 두 사람은 이 책에서 ‘인지과학의 세 가지 주요한 발견’에 입각해서 신체화된 마음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두 사람의 표현을 빌리면 “마음의 과학에서 이 세 가지 발견은, 서양 철학의 핵심적 부분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인지는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한다.
즉 감각 운동 능력을 지닌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경험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첫째, 마음은 본유적으로 신체화되어 있다(마음의 신체화). 인간의 마음은 신체적 경험, 특히 감각운동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마음이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같아서 어떤 적절한 컴퓨터나 신경 하드웨어에도 작용할 수 있는 컴퓨터 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의 인지는 대부분 무의식적이다(인지적 무의식, cognitive unconscious). 의식적 사고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모든 사고의 95%는 무의식적 사고이다.

셋째, 우리의 사고는 대부분 은유적(metaphorical)이다(은유적 사고). 우리는 가령 ‘사랑은 여행’이나 ‘죽음은 무덤’과 같은 개념적 은유(conceptual metaphor)를 수천 개 사용하여 생각하고 말한다. 이러한 은유는 신체화된 경험에서 나온다. 그래서 은유가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마음의 신체화, 인지적 무의식, 은유적 사고는 한데 묶여서 이성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고 전제하면서 특유의 신체화된 마음 이론을 정립했다.
한편 레이코프는 인지언어학을 정치학에 접목시킨 진보적인 이론가로도 유명하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도덕, 정치를 말하다(Moral Politics)』(1996, 2002), 『코끼리는 생각하지마(Don’t Think of An Elephant)』(2004), 『정치적 마음(The Political Mind)』(2008)은 인지언어학의 연구 성과를 미국 정치와 선거에 적용하여 진보 진영의 정치적 좌절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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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마음속의 몸』 출간을 계기로 논의가 시작된 신체화된 인지 개념은 1991년 세 명의 학자가 함께 펴낸 바로 이 책 『몸의 인지과학(The Embodied Mind)』에 의해 인지과학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 1946~2001), 미국의 철학자인 에반 톰슨(Evan Thompson, 1962~), 미국의 인지심리학자인 엘리노어 로쉬(Eleanor Rosch 1938~)는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융합 연구를 통해 독특한 신체화된 인지이론을 정립했다. 이들은 동서양의 사상가를 각각 한 명씩 끌어들여 몸과 마음의 관계를 흥미롭게 분석했다. 한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인도의 승려인 용수(龍樹, 150경~250경)이다.

메를로 퐁티는 프랑스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와 함께 활동하면서, 현상학 창시자인 독일의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후기 학설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실존주의적 현상학을 전개하였다. 주관과 객관, 자연과 정신 등의 이원론적 분열을 배격한 메를로퐁티에게 인간은 신체를 통해 세계 속에 뿌리를 내리는 존재인 ‘신체적 실존’이다. 1945년 펴낸 『지각의 현상학』 서문에서 메를로 퐁티는 “세계는 나의 모든 사고와 나의 모든 분명한 지각의 자연스런 배경이며 환경이다”라고 설파했다. 이러한 신체적 실존에 있어서 마음은 ‘신체를 통하여 체현된’ 것이며 지각이야말로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관계인 것이다. 이를테면 신체적 실존의 현상을 강조한 메를로퐁티는 마음에 관한 연구인 인지과학에서 인간의 경험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서기 2세기 후반에 대승불교 사상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한 용수는 중관론(中觀論)의 창시자이다. 중관론 또는 중론(中論)은 주관과 객관, 대상과 속성, 원인과 결과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분법을 배격한다. 용수는 독립적인 존재성을 지닌 어떠한 것도 결코 발견될 수 없으므로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러한 이유로 공(空)이 아닌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완전한 상호의존성에 관한 용수의 논증은 연기(緣起)의 이론에 관한 그의 저작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연기는 ‘여러 방식으로 발생하는 조건들에 의존함’ 또는 ‘상호의존적 발생’을 의미한다. 연기의 개념을 기본으로 하는 용수의 중론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극단을 배격하는 중도(middle way)의 입장이라는 측면에서 메를로 퐁티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메를로 퐁티와 용수가 언급된 이유는 자명하다. 인지가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인지는 감각 운동 능력을 지닌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경험에 의존하는 것”임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런 맥락에서 저자들은 독특한 신체화된 인지이론을 제안했는데, 다름 아닌 발제주의(發製, enactivism) 또는 발제적 인지과학(enactive cognitive science)이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그 의미를 천착하는 독서 여행을 떠나면 될 것 같다.

이 책 『몸의 인지과학』이 출간되기 전에 대표 저자인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그의 스승인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움베르또 마뚜라나(Humberto Maturana, 1928~)와 함께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1987, 1992)를 펴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이 책의 부제는 ‘인간 이해의 생물학적 뿌리(The Biological Roots of Human Understand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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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화된 인지이론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과학적 증거가 없어 한때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사례가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가령 뜨거운 커피 잔을 들고 있거나 실내 온도가 알맞은 방 안에 있으면 낯선 사람을 대하는 사람의 기분도 누그러졌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협상하면 마음이 부드러운 남자도 상대를 심하게 다그쳤다.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 산에 오르면 비탈이 더 가파르게 느껴졌다. 목이 마르면 물이 들어 있는 병이 더욱 가까이 있는 듯한 착각을 했다. 이런 실험 결과는 몸의 순간적인 느낌이나 사소한 움직임, 예컨대 부드러운 물건을 접촉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이 사회적 판단이나 문제해결 능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요컨대 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깨끗함, 따뜻함, 딱딱함과 같은 감각도 인지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 셈이다.

신체화된 인지이론의 입지를 강화해준 대표적인 연구 성과는 맥베스 부인 효과(Lady Macbeth effect)의 발견이다. 맥베스 부인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남편과 공모하여 국왕을 살해한 뒤 손을 씻으며 “사라져라. 저주받은 핏자국이여”라고 중얼거린다. 그녀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지 않았지만 손을 씻으면 죄의식도 씻겨 내려간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캐나다의 종첸보(Chen-Bo Zhong)와 미국의 캐티 릴렌퀴스트(Katie Liljenquist)는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윤리적 행위나 비윤리적 행위를 했던 과거를 회상하도록 했다. 그리고 W_  _H와 S_  _P를 완성하게 했다. 실험 결과 비윤리적 행위를 떠올린 학생들은 W_  _H를 가령 WISH 가 아니라 WASH,  S_  _P를 STEP이 아니라 SOAP처럼 몸을 씻는 행위와 관련된 단어로 완성할 가능성이 윤리적 행위를 회상한 학생들보다 더 높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비윤리적 행위를 떠올린 학생들은 자신의 마음이 더렵혀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비누로 손을 씻으면 마음도 깨끗해질 것이라고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종교 의식에서 물로 세례를 하는 이유도 죄악이 씻겨 내려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험 결과는 ‘맥베스 부인 효과’라고 명명되어 2006년 『사이언스(Science)』 9월 8일자에 발표되었다. 맥베스 부인 효과는 마음이 윤리와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때 몸의 도움을 받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몸이 마음의 인지기능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신체화된 인지이론을 뒷받침하는 뇌 연구 결과도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2008년 미국 에모리대학의 심리학자인 로렌스 바살로우(Lawrence Barsalou)는 『연간 심리학 평론(Annual Review of Psychology)』에 실린 논문에서 “뇌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몸의 경험을 모의(simulation)하기 때문에” 마음의 인지기능이 ‘몸에 매인(embodied)’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인식|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과 KAIST 겸직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지식융합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융합한 지식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하는 과학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지식의 대융합』, 『나노기술이 세상을 바꾼다』,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 『이인식의 멋진 과학』, 『자연에서 배우는 청색기술』 등이 있다.









"Autopoiesis" (from Greek αὐτo- (auto-), meaning "self", and ποίησις (poiesis), meaning "creation, production") refers to a system capable of reproducing and maintaining itself. The term was introduced in 1972 by Chilean biologistsHumberto Maturana and Francisco Varela to define the self-maintaining chemistry of living cells. Since then the concept has been also applied to the fields of systems theory and sociology.
The original definition can be found in Autopoiesis and Cognition: the Realization of the Living (1st edition 1973, 2nd 1980):
Page 78: - An autopoietic machine is a machine organized (defined as a unity) as a network of processes of production (transformation and destruction) of components which: (i) through their interactions and transformations continuously regenerate and realize the network of processes (relations) that produced them; and (ii) constitute it (the machine) as a concrete unity in space in which they (the components) exist by specifying the topological domain of its realization as such a network. [1]


Page 89:- [...] the space defined by an autopoietic system is self-contained and cannot be described by using dimensions that define another space. When we refer to our interactions with a concrete autopoietic system, however, we project this system on the space of our manipulations and make a description of this projection. [2]






















Francisco Vare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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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is about the Chilean scientist. For the Spanish painter, see Francisco Varela (painter). For the Spanish footballer, see Francisco Varela (footballer).

Varela in Dharamsala India, 1994
Francisco Javier Varela García (September 7, 1946 – May 28, 2001) was a Chilean biologistphilosopher, andneuroscientist who, together with his teacher Humberto Maturana, is best known for introducing the concept ofautopoiesis to biology, and for co-founding the Mind and Life Institute to promote dialog between science andBuddhism.

Life and career[edit]

Varela was born in 1946 in Santiago in Chile, the son of Corina María Elena García-Tapia and Raúl Andrés Varela-Rodríguez.[1] After completing secondary school at the Liceo Aleman del Verbo Divino in Santiago (1951–1963). Like his mentor Humberto Maturana, Varela first studied temporarily medicine at thePontifical Catholic University of Chile to graduate in biology at the University of Chile, and later obtain a Ph.D. in biology at Harvard University. His thesis, defended in 1970 and supervised by Torsten Wiesel, was titled Insect Retinas: Information processing in the compound eye.
After the 1973 military coup led by Augusto Pinochet, Varela and his family spent 7 years in exile in the USA before returning to Chile to become a Professor of biology.
Varela became a Tibetan Buddhist in the 1970s, initially studying, together with Keun-Tshen Goba, with the meditation master Chögyam Trungpa Rinpoche, founder of Vajradhatu and Shambhala Training, and later with Tulku Urgyen Rinpoche, a Nepalese meditation master of higher tantras.
In 1986, he settled in France, where he at first taught cognitive science and epistemology at the École Polytechnique, and neuroscience at the University of Paris. From 1988 until his death, he led a research group at the CNRS (Centre National de Recherche Scientifique).
In 1987, Varela, along with R. Adam Engle, founded the Mind and Life Institute, initially to sponsor a series of dialogues between scientists and His Holiness The Dalai Lama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modern science and Buddhism.[2] The Institute continues today as a major nexus for such dialog as well as promoting and supporting multi-disciplinary scientific investigation in mind sciences, contemplative scholarship and practice and related areas in the interface of science with meditation and other contemplative practices, especially Buddhist practices.[3]
Varela died in 2001 in Paris of Hepatitis C after having written an account of his 1998 liver transplant.[4] Varela had four children, including the actress, environmental spokesperson, and model Leonor Varela.

Work[edit]

Varela was primarily trained as a biologist, and was fundamentally influenced by his teacher and fellow Chilean, Humberto Maturana, also a biologist with a strong philosophical orientation.
Varela wrote and edited a number of books and numerous journal articles in biologyneurologycognitive sciencemathematics, and philosophy. He was a founding member of the Integral Institute, a thinktank dedicated to the cross-fertilization of ideas and disciplines.
Varela was a proponent of the embodied philosophy which argues that human cognition and consciousness can only be understood in terms of the enactive structures in which they arise, namely the body (understood both as a biological system and as personally, phenomenologically experienced) and the physical world with which the body interacts. He introduced into neuroscience the concepts of neurophenomenology, based on the phenomenological writings of Edmund Husserl and of Maurice Merleau-Ponty, and on "first person science," in which observers examine their own conscious experience using scientifically verifiable methods.

See also[edit]

Publications[edit]

Varela wrote numerous books and articles:[5]
  • 1980 (with Humberto Maturana). Autopoiesis and Cognition: The Realization of the Living. Boston: Reidel.
  • 1979. Principles of Biological Autonomy. North-Holland.
  • 1998 (1987) (with Humberto Maturana). The Tree of Knowledge: The Biological Roots of Human Understanding. Boston: Shambhala Press.
  • 1991 (with Evan Thompson and Eleanor Rosch). The Embodied Mind: Cognitive Science and Human Experience. MIT Press. ISBN 978-0-262-72021-2
  • 1992 (with P. Bourgine, eds.). Towards a Practice of Autonomous Systems: The First European Conference on Artificial Life. MIT Press.
  • 1992 (with J. Hayward, eds.). Gentle Bridges: Dialogues Between the Cognitive Sciences and the Buddhist Tradition. Boston: Shambhala Press.
  • 1993 ( with D. Stein, eds.). Thinking About Biology: An Introduction to Theoretical Biology. Addison-Wesley, SFI Series on Complexity.
  • 1997 (ed.). Sleeping, Dreaming and Dying. Boston: Wisdom Book.
  • 1996-99. Invitation aux sciences cognitives. Paris: Seuil.
  • 1999. Ethical Know-How: Action, Wisdom and Cogni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 1999 (with J. Shear, eds.). The View from Within: First-Person Methodologies in the Study of Consciousness. London: Imprint Academic.
  • 1999 (with J. Petitot, B. Pachoud, and J-M. Roy, eds.). Naturalizing Phenomenology: Contemporary Issues in Phenomenology and Cognitive Science. Stanford University Press.

References[edit]

Further reading[edit]

Sarat Maharaj & Francisco Varela in conversation: "Ahamkara". In: Dombois, Florian, Mareis, Claudia, Meta Bauer, Ute, and Schwab, Michael, eds.Intellectual Birdhouse: Art Practice as Research. London: Koenig, 2011. ISBN 978-3-86335-118-2.

External links[edit]